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밤이다.
휴식을 취하지 못한 내 몸은 오늘을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지 않았다.
무겁게 늘어지는 육체,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 나를 짓누르는 아침이다.
안토넬로는 응징을 받아야만 했다. 아침부터 우리 모두는 안토넬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숨도 못잔 나와 까뜨린, 그리고 발로 몇번이고 위를 쳤다고 하는 루이스, 그리고 바닥의 아나이즈까지.
우리의 불만은 엄청났고, 순진한 이탈리안 청년은 미안함과 민망함에 얼굴이 한껏 붉어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안토넬로는 그 전까지는 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수많은 사람들 중 그런 불만을 얘기 해 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오 마이 갓!
그 전날 안토넬로와 함께 숙소를 썼을 때 그는 방이 없어 세탁실에서 혼자 잤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 코골이는 하루아침에 나타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 밤의 우연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해비스노어(heavy snorer) 한명이 추가 된 아침이다.
전날의 피곤함이 고마워졌다. 머릿속이 멍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굴리, 안토넬로, 까뜨린 등등, 수많은 우리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루이스와 나, 케샤에게 일일이 포옹과 볼키스를 선사했고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는 기약을 나눴다.
정말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 행운이 함께 하길 ! 부엔 카미노.
남겨진 우리는 산토도밍고의 조용한 아침속을 걸어 작은 카페로 향했다.
커피와 간단한 빵을 시켰다.
나는 도무지 말을 할 힘이 없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함께 남아 준 케샤가 너무 고마웠다.
케샤와 루이스는 끊임없이 무슨 이야기를 했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노라며 그저 조용히 있었다.
그저 머릿속이 멍 했다. 피곤함 때문이리라, 하지만 애써 피곤함을 변명삼아 이 상황을 회피하려 함을 나는 알고 있었다.
헤어짐, 이별, 그런 것들은 싫다.
딱히 무슨 할말도 없고 그렇다고 꼭 다시 만나자는 지켜질 지 알 수 없는 약속들을 내뱉기도 싫다.
길, 끝이 보이는 이 길에서는 인연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좋은 친구는 그저 길 위에서의 좋은 기억으로만 남겨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를 너무 깊은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한참을 별자리와 미래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케샤가, 갑자기 먼저 일어나보겠다고 한다.
왜? 라는 질문에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졌노라며 다음 마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노라 말한다.
그리고 붙잡을 시간도 주지 않고 계산을 하고 나가버린다.
당황스러웠다. 나의 침묵은 더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왜 가는 거지 ?
라는 나의 물음에, 고맙다고 루이스가 응답한다. 피식 웃고만다.
아직 아침 열시, 그의 친구들이 오려면 적어도 두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이미 이 카페에도 두시간을 앉아 있었다. 작고 조용한 이 카페에서 4시간을 버티고 있어야 한다니, 주인에게 조금 민망하다.
루이스가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한다.
나는 케샤가 남기고 간 그녀의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는 종이조각을 챙기고,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테이블을 조금 정리한다.
갑자기 루이스가 날 향해 앉는다.
"손을 펴봐."
왜 라고 물으며 손을 폈다. 그리고 그는 내 손위에 예쁜 동전 하나를 올려주며, 럭키 코인 이라 말한다.
덴마크에서 온 행운의 동전, 그는 이 동전 때문에 이 곳에 오게 되었고 그것을 나에게 선물로 준다고 한다.
하트가 그려져 있는 예쁜 동전, 이 동전은 루이스가 2년 전 카미노를 걷다가 만난 덴마크 여자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와 그는 서로에게 반했고, 그녀가 준 이 동전을 그는 소중하게 열쇠고리에 걸어 둔 채 2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루이스는 원래 카미노를 올 계획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파리로 긴 휴가를 떠나려고 하던 날 아침, 갑자기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이 동전이 떨어졌다고 한다.
2년간 한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동전이 갑자기 떨어지던 그 순간, 그는 카미노를 가야함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생장피드포르에 내려달라 말을 하고 카미노를 시작했고,
둘쨋날 아침 론세스바이어스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그날 아침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 표정에 신뢰가 없어 보였는지 그가 이 동전이 열쇠고리에서 빠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겠다며 열쇠고리를 꺼낸다.
"여기에 이 동전이 이렇게 꽃혀 있었... 오마이갓. "
그 곳에는 여전히 코루나가 있었다. 두 개의 코루나, 그는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 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정말 놀라워 했고, 덴마크 동전이 포르투갈에서, 그것도 갑자기 자기 앞에 떨어진 이 일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일어났고, 우주의 계시를 믿는 그는 받아 드렸다. 나 또한 믿을 수 없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동전은 내 손에 쥐어졌다. 행운의 동전, 내가 받기엔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돌려 줄 수도 없었다. 소중히 잘 간직하겠노라 말하고 손에 꼭 쥐고 있는다.
나는 그에게 줄 것이 없었다. 왜 한국에서 기념품을 하나도 챙겨오지 않은 건지, 아쉬움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퉁퉁 부은 발에 살짝 걸쳐져 있는, 다른 순례자에게서 받은 플립플랍이었다.
그에게 선물하겠노라고, 절뚝거리는 발을 다시 부츠속에 밀어넣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어본다.
고맙다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할 때까지 잘 보관하겠노라 말하며 이마에 뽀뽀를 해 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짐을 싸고, 나는 동전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는다.
별로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우린 별로 할말이 없다.
그렇지만 침묵이 불편하진 않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12시가 되었다.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꽤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아직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들이 올때까지 기다려주고 산토도밍고에서 하루를 쉬고 싶었다.
하지만 앞 마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케샤가 신경쓰였고, 그 역시 케샤 걱정에 날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곧 올것이고, 나는 12시까지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에 떠나도 된다고 한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그러겠노라고 한다.
한국이었다면 기다렸을테지만, 이 곳의 문화에 아직 익숙치 못한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이들어 한국에서 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굳이 괜찮다는데도 쩔뚝거리며 루이스가 따라 나선다. 마을 입구까지만 배웅을 해 주겠다고 한다.
마을 입구로 가는 길에 할아버지 순례자 한명을 만났다. 루이스가 반갑게 인사한다.
그는 오늘 돌아간다고, 늘 조심하고 행운을 빈다고 말하며 헤어진다.
할아버지 순례자는 루이스가 첫 날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호주에서 온 80세가 넘은 그는 심장질환이 있었다. 카미노를 가겠다는 그를 자식들은 차마 그냥 보낼 수 없었고,
그는 몸에 실시간으로 위치와 심박수, 혈압을 체크해주는 GPS 장치를 달고서야 이 곳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웃으며 GPS를 보여주는 그의 미소가 정말 행복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건강이 점점 나아지고 있노라며, 하지만 자식들이 걱정할 것 같아 이것을 계속 달고 다닌다 말한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경외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는 이 길을 목숨을 담보로 한 채 걷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걱정하는 그 길 위에서 그는 행복했다.
그의 건강을, 그가 무사히 카미노를 끝낼 수 있기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빌었다. 아마 그는 카미노를 끝마쳤을 것이다.
행복한 순례자로, 그 길 위에서는 모두가 행복했고 평화로웠다. 정말 기적과 같은 길이다.
루이스는 첫 날 만난 그 할아버지 순례자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꼭 다시 만나게 되기를 빌고 또 빌었고, 마지막 날 건강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너무 행운이라고 말했다.
반짝이는 루이스의 눈빛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세상에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반짝이는 눈으로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사람,
루이스가 가진 사명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우리는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예배당앞에 멈추어 섰다.
예배당을 지나면 큰 다리가 나오고, 그 곳부터는 이 마을이 끝이 난다고 했다.
"It's time to say good-bye."
우리는 조금은 긴 포옹을 나누고, 서로의 행복을 빌었다.
그는 내가 무사히 이 길을 무사히 마치기를, 에너지 뱀파이어들에게 나의 이 순수한 에너지를 뺏기지 않기를,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반드시 그에게 메일을 보낼 것을 당부했다. 덧붙여 너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도.
따뜻한 바람이 불던 그 날,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던 그 몽롱했던 순간.
내가 다시 카미노를, 산토도밍고를 지나치게 된다면 이 예배당을 지날 때마다 그를 기억해 달라 말한다.
당연히, 이 뿐만이 아니라 론세스바이어스부터 산토도밍고 까지 모든 순간 너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생각했지만
내뱉지 못하고 그저 sure 라고 답한다.
" buen Camino, take care."
그렇게 나는 돌아섰고, 그 긴 다리가 끝날 때 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다리가 끝나 오른쪽으로 돌아야 했을 때, 그가 아직 있을까 하고 살짝 돌아 본 그 예배당에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는 그를 보고야 말았다. 나도 손을 흔들어 준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다시 돌아보는 것이 미련해 보며 억지로 돌아보지 않고 그냥 길을 걸었다. 솔직하지 못한 나였으니까.
정말 너무 많은 생각이 드는 길이었다. 배가 고프고 갈증에 목이 말라 갔지만 나는 무엇을 먹을수도 물을 마실수도 없었다.
그저 걸었다. 따뜻하게 살랑살랑 불어오는 스페인의 바람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정말 오랫만에 혼자가 된 기분이었고 몹시 외롭고 심란했다.
케샤에게 전해 달라는 그의 지팡이가 작은 위로가 되었지만, 내 마음 속에 부는 폭풍을 잠재우진 못했다.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으로 땅만보고 그저 걸었다. 그와 함께했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순간들을 떠올렸다.
매 순간이 영화속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따뜻한 한줄기 바람같은,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
그렇게 언덕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갔고, 언덕의 끝에서 고개를 든 그 순간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커다란 철 십자가, 그리고 누군가 방금 써 놓고 간 듯한 PEACE & LOVE.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푸른 하늘과 넓은 벌판, 따뜻한 바람, 그리고 peace & love..
복잡한 머릿속이 갑자기 정리되며 타는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물을 마시고, 심호흡을 한다.
웃음이 났다.
이 시점에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엄청난 평화와 사랑을 믿을수가 없어서, 이 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웃었다.
루이스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곳으로 왔듯이, 나 또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곳에 있게 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 것이 아닌, 내가 이 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어쩐지 다시 힘이났다. 얼른 가서 케샤를 만나야 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길위에서 우연히 내가 첫날 만났던 바바라와 헬레나를 만나게 되었다. 오 마이 갓 !
서로에게 포옹을 해주며 재회를 반가워했다.
바바라는 살이 많이 빠져 있었고, 쑥스럼 많던 소녀였던 헬레나는 꽤나 적극적인 활발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영어를 못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던 단어들도 이제 꽤나 자연스럽게 꺼내곤 한다. 카미노가 만든 또 하나의 선물.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다들 잘 지냈노라고, 바바라는 그녀의 헤어진 남편이 그녀에게 다시 돌아 올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헬레나가 많이 밝아져서 기쁘며,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나의 카미노 첫날의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루이스 또한 그러했다. 그의 끝이었고, 나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평화와 사랑, 루이스가 떠난 나의 두번째 카미노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쉬어가겠다는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나를 기다리는 일행이 있노라며, 조금있다 다시 보자 말하고 길을 걸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루이스의 반짝이는 눈과 이 길 위의 에너지와 기적을 믿으라던 그의 이야기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에 컴퓨터를 하게 된다면 꼭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겠노라 생각했다.
다음 마을의 광장에서 나는 케샤와 캐롤라인을 만나게 되었다.
홀란드에서 온 캐롤라인은 다리가 너무 아파 이 곳에서 쉬어 가려고 하던 찰나에 케샤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하루를 묵겠다던 케샤는 우리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며, 날더러 함께 힘을 내서 걷자고 얘기한다.
일단 뭘 좀 먹고 생각하겠다고 답을 하고, 작은 상점에서 쿠키와 콜라를 사와서 먹는다.
루이스는 잘 갔냐고 케샤가 물었다.
친구들이 오지 않았고 나는 먼저 떠났다고 말을 하며, 왜 자리를 피해줬느냐 물어보았다.
"그냥, 둘이 있게 해 줘야 할 것 같았어."
라는 알 수 없는 대답. 고맙다고, 하지만 굳이 그러진 않아도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걸 원하는 것 같았어. "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 나도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친창인데 말이다.
캐롤라인이 루이스와 특별한 사이냐고 물어본다. 친한 친구 일 뿐이라 대답한다. 그러했으니까.
화장실을 가기 위해 근처에 있는 성당 겸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 곳은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아주 작은 알베르게였다. 몇몇 순례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고,
화장실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우리에게 흔쾌히 성당 구경까지 시켜준다.
한 쪽 벽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발견한 케샤가 한 곡 쳐 드리겠노라며 연주와 노래를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아주 잘 치는 기타는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순수했다.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그리고 나는 케샤와 함께 걷기로 결정했다.
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주려는 듯이 케샤는 한 순간도 날 떠나지 않는다. 혼자 있고 싶었지만, 그녀를 보내지 못한다.
꽤나 걸음이 빠른 그녀였지만, 내 옆에서 내 보폭에 맞추어 쉴새 없이 떠들며 길을 걷는다.
케샤는 그녀의 가족사에 대해 말을 한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지금 엄마와 살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어렸을때는 꽤나 힘들었노라고, 그리고 자신은 이혼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노라 말한다. 그녀를 스쳐 지나간 남자들에 대해서도 말했고, 그녀가 몇일 전 보내야만 했던 사우로에 대해서도 말한다.
건성으로 그녀에게 대답한다.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대답을 만들어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하던 케샤가 나에 대해 묻는다.
한국에서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노라 말한다.
그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고 멋있는 사람이고, 아마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모든 것이 완벽한, 결혼하기엔 정말 괜찮은, 나에겐 과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 ?
사실 나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 역시 케샤처럼 결혼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상처받은 영혼이니까.
내가 갖고 있는 그 불안감과 불확실함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헤아린 듯이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사랑에 대해 말한다.
이혼하지 않을 수 있는, 평생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취미와 영혼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여러가지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
무지개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노라고..
어느 색 하나가 부족하고 작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모든것이 조화로운 그런 무지개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노라 말한다.
각자 이상적인 사랑을 머릿속에 그리며 꿈속을 걷듯 길을 걷고 있을 그 때, 케샤가 소리를 쳤다.
"Oh my god ! look at there ! "
그녀가 가르킨 곳에는 정말 말도 안되게 무지개가 떠 있었다. 아주 작은 무지개 였지만, 그 것은 무지개였다.
흐린 날씨, 그리고 살짝 올라가 있는 언덕 위로 햇빛이 비치고 그 위로 무지개가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우리 얘기를 누군가가 듣고 무지개를 우리에게 보내 준 듯한,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 또 나타났다. 정말 나는 이 곳의 기적을, 카미노의 에너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일을 믿을 수 없어 우리는 한동안 무지개를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한결 괜찮아졌다. 발이 아파 플립플랍을 신고 걷는 나를 따라 발에 물집이 가득한 캐롤라인도 플립플랍으로 갈아신었다.
우리 셋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는다. 고속도로 옆으로 난 길이 꽤나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반바지를 입고 걷는 여자 순례자들을 스페인 운전 기사들은 몹시 관심이 많았다. 지나가는 차들이 모두 빵빵 하고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도 모두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계속 길을 걷는다.
케샤도 나도 바지가 꽤나 짧았고, 캐롤라인은 너희 둘의 그 짧은 바지덕에 나도 함께 관심을 받는다며 고맙다며 웃는다.
우리는 괜히 더 신나서 도도하게 걷기도 하고, 또 미친듯이 웃어 가며 그렇게 길을 걸었다.
Happy crazy pilgrims !
도로는 끝이 났고, 작은 마을을 하나 더 지났다. 케샤가 가려고 하는 마을은 5km 너머에 있었다.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고 우리는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 가의 작은 바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기로 했다.
아주 작은 마을의 도로가에 있는 전형적인 스페니쉬 바 였다.
스페인 여자들은 여자 순례자들에게 몹시 적대적이다. 반면 남자들은 우리에게 몹시 친절하다.
그리고 남자 순례자들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정말 감정에 충실한, 솔직한 스페니쉬들이다.
바의 여주인은 우리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주인 아저씨는 잘 통하지도 않는 스페인어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는다.
스페인어를 아주 조금 하는 케샤가 뭐라고 대답을 한다. 뭐 대화가 썩 잘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는데, 긍정으로 무장한 그녀는 연신 Si(네), Si~ 거리며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두 잔의 클라라를 마시고, 너무도 말이 많았던 그 주인을 피하다시피 하여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주인이 했던 말은 대충 이러했다.
날씨는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가려는 벨로라도에는 오늘 큰 축제가 있으니 시내에 나가서 춤을 추고 놀수 있다고 .. 그 피에스타를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쓴 것이었다.
파티라는 말에 케샤는 또 신이 났다. 그리고 지친 두 언니들을 이끌고 앞으로 가기 시작한다.
지루하고 끝도 없을 것 같은 돌길이었다. 마을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은 길을 한참을 더 걸었고,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8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벨로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울고 싶었다. 왜 나는 혼자 남지 못하고 또 이렇게 원치 않은 선택을 하게 된 걸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내고야 마는 이 파란 눈의 아이들이 부러웠다.
거절을 잘 못하는 내 성격과, 그런 성격을 만들어준 내 모국에 대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겨먹었을 뿐인데 말이다.
두번째 알베르게까지 찾아 갈 힘이 없어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굴리와 안토넬로, 그리고 몇몇 낯익은 순례자들이 있었다. 굴리와 안토넬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아이슬란드에서온 거인 굴리는 오마이엔젤!을 외치며 나를 번쩍 들어 버린다. 그리고 머리에 찐한 뽀뽀를 쪽 소리가 나게 해준다. 당황했다. 난 이런 갑작스런 스킨쉽에 늘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놀랄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에휴.
반대로 케샤는 스스로가 굴리에게 폭 안겨서 다시 보게 되어 너무 반갑다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몸으로 느끼는 문화차이다.
외모 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동양과 서양의 문화. 그리고 지극히 동양인인 나는 그러한 문화차이에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도 숙소에는 조그마한 야외 풀장이 있었고, 우리는 옷만 갈아입고 나와 풀장으로 바로 뛰어 들었다.
그냥 간만에 물에 뜨는 느낌을 느끼고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밤 9시의 수영장은 너무 추웠다....
그리고 나와 함께 수영을 했던 수많은 개미와 정체모를 곤충들.. 케샤와 나는 또 푸하하하하 웃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릴 바라보고 있던 이탈리안 순례자 몇명이 개미와 함께 수영한 기분이 어떠냐 물으며 웃는다. It's sooooooo coooool ;)
너무 피곤해 도저히 마을로 나가지는 못했다. 우리의 젊은 순례자 친구들은 파티를 위해 이미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나는 씻고 친구들과 함께 알베르게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이탈리안 세명이 추가된 덕에 저녁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더 소란스러웠다.
이탈리아노들은 정말 씨끄럽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배우며 자라기 때문에 제스쳐도 목소리도 모두 크다.
혼자 있는 여자를 가만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 이탈리안 남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하루에 5번 먹는 밥과, 그들의 커피 사랑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밥 먹고 디저트 먹고 입가심으로 와인한잔을 한 뒤에도 마무리는 에스프레소 였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은 보통 10시쯤 끝이 난다고 한다.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이 너무 뜨거워 씨에스타가 있는 나라들은 보통 저녁이 늦었다. 일이 늦게 끝나니 그럴 수 밖에.
반면 추운 나라인 아이슬랜드, 폴란드는 우리나라처럼 7시쯤이면 저녁을 먹으며 그 뒤로는 따로 술을 먹거나 집에서 쉰다고 한다.
커피를 하루에 수십잔씩 마시고 한번에 조금씩 여러번 계속해서 먹는 문화는 정말 힘들 것 같다고 얘기하며, 우리가 서로 얼마나 많이 다른곳에서 왔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도 이 열정적인 이탈리아노들은 와인 한잔을 더 하자며 숨겨 온 와인을 꺼내들고 온다. 저녁과 함께 먹은 와인과는 질이 다른 좋은 와인이라며, 이 것을 들고 오는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또 장황하게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낮의 뜨거운 열기를 모두 집어삼킨 차가운 어둠속에서 떨면서 와인을 마셨다.
신나서 얘기하는 젊은 이탈리아노들과 쭉 함께 있기에 나는 너무도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먼저 들어가겠노라며, 내가 할당받은 만큼의 와인을 단숨에 들이키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같은 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조용한 스페니쉬 자전거 순례자들과 한방을 쓰게 됨에 감사하며, 조용한 방에서 조용히 잠을 청한다. 정신없는 저녁시간을 보내느라 잠시 잊었던 낮의 혼란스러움이 조용한 밤에서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다.
방향도 답도 없는 혼란스러움, 그리고 낮에 만난 PEACE & LOVE.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이 거대한 자연과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의 카미노 첫날부터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씩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모두가 웃고있는 길이기에 슬픈 얼굴은 없었다.
고마운 사람들,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그 중 가장 아름다웠던 반짝이는 루이스를 생각한다.
지금 내가 이 곳에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렇게 까만 밤 속에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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