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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10. 폭풍내음




2011년 8월 31일  

Na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  |   21.2Km   



"부에노스 디아스"

소곤대는 아침인사소리에 잠에서 깬다.  
우리 일행 여섯명과 다른 순례자 두명이서 쓴 8인실 방은 아주 훌륭했다.

상쾌한 아침이다.

씻기위해 서두를 필요도 없다.  사설 알베르게의 달콤한 맛을 만끽할 수 있었던 아침이었다. 


까뜨린이 우리의 아침을 챙기기 위해 주방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어이없는 웃음이 이어진다.


"Oh my god ! We forgot about it ! "


그녀가 들고온 것은 어젯밤에 먹기위해 사 놓은 맥주와 레몬쥬스, 그리고 수박.
시원하게 먹겠다고 냉동실에 넣어둔 채 깜빡해버려 꽁꽁 얼어있었다. 박장대소, 너나 할것없이 배를 잡고 웃는다.




 



이것을 어떻게 들고 나를 것인가가 관건.  공정하게 우린 가위바위보를 했고 루이스는 수박을, 까뜨린은 음료수를,
그리고 난 맥주를 운반하게 되었다... 먼저 출발한 안토넬로와 알렉산더가 못내 야속하게 느껴졌다.

10kg의 가방에는 도저히 저 맥주가 들어갈 공간이 없어 그냥 봉지채로 손에 들고 터덜터덜 걷는다. 
가방을 메고 짐을 손에 들고 걷는 것, 아... 무겁다기 보다 그냥 좀 불편하고 힘들었다.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

어느 덧 우리의 목표는 조금 앞서있는 안토넬로와 알렉산더를 따라잡아 짐을 넘기는 것이 되었다. 
저 길 끝에 조그맣게 보이는 그들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또 걷는다. 






 
어쩐지 흐린 아침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름많은 아침은 선선한 오후를 알려주므로 반갑다.
적어도 너무 뜨거운 태양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결국 앞서가다 쉬고있는 안토넬로와 알렉산더를 만났고, 짐을 그들에게 넘기는 대신 짐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아침 9시, 이것이 바로 낮술도 아닌 아침 술 !










우리는 반쯤 녹은 레몬쥬스와 맥주를 섞어 클라라를 만든다음 돌려가며 조금씩 마셨다. 

보통 점심시간에 먹는 단골메뉴, 아침에 먹어도 맛있다 ! 먹을때는 좋다. 행복하다.

한참을 즐겁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한국인 락 오빠가 지나갔다.
다시 못만날줄 알았는데 ! 한참을 앞서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게 되서 무척 반가웠다.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우리를 보고 어이없다고 하며 한모금 거들라는 성의를 사뿐히 패스해주셨다.
그리고는 피곤하다며 아스팔트 위에 드러눕는다. 

한숨 자고 가겠다는 락 오빠를 뒤로 한채,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알딸딸.

기분좋다.

베낭이 너무 무겁다.

다리가 너무 무겁다.

oTL...............................



이래서 아침부터 술 마시면 안되다 하나보다.. 정말 한걸음 한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었다.
모두가 정말 우린 미쳤다고 얘기하며 힘들게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음 마을에서 나타난 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다.

움직일 힘이 없다.


커피를 사랑하는 안토넬로가 우리 모두의 커피를 사왔다. 공짜로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커피를 쏘겠다고 한다.
매너도 좋고, 매력도 넘치는 이탈리아노 안토넬로다. 24살밖에 안됐다는게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커피를 마시니 또 뭔가 빵이 먹고 싶어서 우리는 준비해 온 음식들을 꺼내서 함께 먹었다.
빵과 치즈, 그리고 햄.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샌드위치의 맛은 정말 최고다 !

우리가 자리 잡은 길 가 맞은편 집 지붕에 제비집이 있었다. 
제비가 들락날락,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오랫만에 보는 제비집. 반갑다. 


한국에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것 중의 하나이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집에 봄이면 늘 찾아오던 그 제비들이 그립다.
할머니도 제비도, 이젠 볼 수 없지만 말이다. 






부지런히 그리고 재빨리 들락날락거리는 제비를 바라보며 커피와 빵을 먹는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게 되어 음식이 넉넉하진 않았다. 
배불리 먹진 못했지만 조금씩 나눠 먹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순례자들 이었다.

그때 스페니쉬 페페가 햄 한장을 덥석 들더니 그의 개 암마에게 던져준다. 치즈도 한장 들더니 또 던져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와 까뜨린은 완전 기겁하고 말았다.
더 먹고 싶어도 부족하니까 먹지 않고 참고 있었는데,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은 손님 페페가 자신도 모자라서 그의 개에게 까지 부족한 음식을 나눠준다. 물론 개도 힘들고, 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최소한 양해정도는 구해야하지 않았을까 ?

혹은 커피를 사 온 안토넬로처럼, 최소한 초콜렛 하나라도 사서 나눠먹는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

매일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돈이 결코 부족하지는 않을 듯한 휴가온 변호사님이 말이다.


간단한 두번째 아침을 먹고 다시 나선 길, 까뜨린과 나의 주제는 단연 페페였다.
그의 그러한 행동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용납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해본다. 

결론은, 적어도 독일이나 한국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다. 
혹은 까뜨린과 나에게는 용납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였다. 


똑같은 행동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만약 그와 같은 행동을 하루에 써야할 금액을 정해놓고 1유로 쓰는 것도 덜덜 떨어대는 가난한 학생들이 했더라면 조금은 용납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보나 누구보다 넉넉할 법한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로 우리는 그를 피했으니 말이다. 
만남과 이별이 너무도 쉬운 이 길, 그리고 사람을 향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받아 들여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해바라기들이 우릴 향해 웃고 있다. 
재치 넘치는 사람들, 누군가의 기막힌 아이디어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스페인의 해바라기들은 해를 향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무래도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가보다. 

파아란 하늘아래 노오랗게 펼쳐져 있는 해바라기 밭이 너무 이쁘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해바라기 밭.



그림같이 아름다운 길을, 오늘도 그저 걷는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졌고,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까뜨린과 나는 아침부터 술을 마신 것은 큰 실수라고 자학해가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이 카미노에서의 마지막날인 루이스의 곁에는 굴리, 안토넬로, 알렉산더, 몰리 등이 계속 함께였다.
마지막을 함께 걷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 짧았지만 깊은 우정이다. 

나 역시 루이스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고 함께 걷고 싶었지만, 굳이 표현하진 않았다. 
루이스도 어쩐지 내가 신경 쓰였는지 한번씩 뒤돌아 와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한마디씩 말도 걸고 했다. 

고마운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이 많은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곧 이 곳을 떠날 그에게 내가 줄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조금 안타까웠다. 



메마른 언덕을 한참 올라갔다. 짚더미를 한가득 실은 트럭 몇대가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여러번 지나간다.
건조하고 메마른 스페인의 여름, 먼지속을 뚫고 걷다보면 온몸이 메말라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언덕의 끄트머리에 꽤나 넓은 쉼터가 있었다. 샘이 있었고, 의자가 있어 우리는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길가다 따 놓은 아몬드를 깨 먹고, 각자 가방에 넣어 둔 작은 스낵들을 꺼내 나눠 먹는다. 

순례자들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듯한 돌로만든 거대한 의자에 걸터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푸르다. 더없이 넓고 한없이 푸르다. 


나란히 있는 돌의자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온 굴리와 내가 앉아 쉬고있다. 
햇볕을 받은 돌의자는 적당한 온도를 그 속에 품고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고 있다. 

흐린날이라 꽤나 쌀쌀했던터라 따뜻한 의자의 온기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굴리가 나를 부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몇살인지 물어봐도 되겠냐한다. 

나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도 나이를 말해준다. 생각보다 젊다.. 덩치가 커서 나이가 한참 많을 줄 알았는데 31살 이라 한다. 
내 나이를 듣고는 놀랜다. 아시안이 확실히 동안은 동안이구나 실감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나에게 어떻게 하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어쩐지 간만에 듣는 듯한 질문, 낯선 사람을 한동안 만나지 않게 되면서 이 곳에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내가 이 곳에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했고, 어찌어찌 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노라, 100일간의 여행중이며 지금 두어달 지났노라 말한다.
내 인생의 무엇인가를 찾으러 왔는데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말한다.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요가를 가르키던 강사였다. 그의 형은 아이슬란드에서 유명한 요가 강사라고 한다.
형을 도와 일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몸을 다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요가를 할 수 없어 다른 삶의 방향을 찾기위해 이곳에 왔노라고, 이 길이 끝나기 전에 꼭 찾아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다. 알고보니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모두들 인생길에서 무엇인가 변화를 꿈꾸고 이곳으로 온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서 만난 우리들은 그토록 비슷하고 또 달랐다.
서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르게 자랐지만, 어떤 알수없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지금 이 곳에서 인생의 화살표를 찾고 있는 우리는, 슬플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방황을 하고 있는 걸까?

각자의 나라에서는 결코 정상이 아닌 사람들,
그 사회에서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선택을 하여 이 곳으로 모여든 조금은 이상한 사람들, 
이 곳에 모여있는 우리는 서로를 crazy pilgrims 라고 표현했고, 그 crazy 라는 단어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미쳤으면 어떠한가, 우린 이토록 치열하게 내 존재의 이유와 삶의 방향을 찾으려 싸우고 있는데 말이다. 
비록 그 이유와 방향이 남들과는 많이 다를 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20여분간의 굴리와의 대화는 참으로 따뜻했다. 내 마음의 작은 불씨를 다시 찾은 기분, 
서로가 원하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이 길의 끝에서 꼭 찾기를 바란다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했다. 

목소리 크고 저질스러운 아이슬란드인이라 생각했던 굴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었다.
그의 큰 덩치보다도 마음이 더 큰, 추운나라에서 온 따뜻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하늘위에 떠 있는 구름.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고, 이렇게 바꼈다 저렇게 바꼈다 하는 구름보다는
그저 넓은 하늘이 되고 싶다. 하늘같이 넓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상을 보듬고 사랑하며 즐기며 살 줄 아는 사람이 되리라. 



길은 길었고, 햇살은 다시 뜨거워졌다. 

까뜨린과 나는 시원한 풀장에 뛰어드는 상상을 하며 길을 걸었다.
시원한 풀장에서 둥둥 떠있고 싶은 마음, 하지만 상상만으로 달래지지 않았다. 결국 그저 또 걸을 뿐이었다.


목적지를 6km쯤 남겨두고서가 항상 가장 힘들다.
오후 두세시쯤의 뜨거운 햇살과 지쳐버린 체력에 마지막 6km, 한시간 삼십분여가 늘 가장 고되다.  

그 때는 함께 얘기하며 걷는 것은 서로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저 각자 걷게된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뜨거운 태양 때문에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으리.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나 역시 그저 걷고 있었다. 
굴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던 루이스가 나와 함께 얘기를 하고 싶노라며 함께 걷자고 한다.

그의 마지막 날, 그렇게 또 나를 챙겨주고 찾아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컨디션이 어떻냐고 묻는다. 몇일 전부터 발에 심각한 통증을 호소 했던 그였기에 꽤나 걱정이 된다. 
많이 아픈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살짝 쩔둑 거리며 걷는 그가 걱정스럽다.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되어 아쉽노라 그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모든것에 고맙다고 말해준다. 
그 이상 구구절절 표현하기는 내 영어 실력도 딸리고 기력도 딸린다. 

그도 마찬가지로 모든것에 너무 고맙고, 이렇게 헤어짐이 너무 아쉽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살고있는 포르투갈의 에보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어쩐지 불안해 보인다. 

나는 아직 그의 초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가 그 초대를 잊었으리라 생각하나보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그의 공간에 들려 준다면 정말 너무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아직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계획대로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내가 포르투갈을 가게 된다면 꼭 들리겠노라 약속한다. 
진심이었다. 그의 공간이 너무 궁금했고, 그의 초대도 너무 고마웠고, 이렇게 헤어짐이 아쉬웠다. 

만약 중간에 나의 계획이 변경되어 포르투갈을 지나가지 않게 되더라도 꼭 메일을 달라고, 
내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노라 말한다. 


이 낯선 포르투갈인은 왜 나에게 이토록 친절한걸까?
그리고 나는 그의 호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왜 그토록 그의 곁에 있는 좋은 친구들 얘기만 하는지, 왜 사랑이야기는 하지 않는지, 
니가 사는 그 공간에 내가 가면 너의 삶에 문제가 생기는게 아닌지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때론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것도 물을 수 없었고,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야 한없이 컸지만,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고작 만난지 몇일밖에 안된 사이인데, 왠지 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든다.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토록 편안한 느낌이 들진 않았었다. 

그에게 얘기한다. 아주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던 편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라고, 그리고 나는 너와 둘이 있는 것이 너무 편하다고. 
그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말을 삼킨다. 나 역시 말을 삼킨다. 
말로 꺼낼 수 없는, 말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 낯선 기분 앞에서 나는 당황스러웠고, 그저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함께 또 따로 걷던 우리 친구들이 마을 입구에 멈춰서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알베르게다. 
길을 걷다 프랑스에서 온 아나이즈가 우리와 합류했다. 차가워 보이는 프랑스인이었다.

굴리의 놀라운 발견, 함께 걷던 우리는 모두 국적이 달랐다 ! 기념으로 사진을 찍기로 한다.




 


프랑스에서 온 아나이즈, 아이슬란드에서 온 굴리, 스페니쉬 페페, 독일인 까뜨린, 뉴질랜드에서 온 몰리, 
한국에서 온 나,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안토넬로, 브라질에서 온 산드라,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온 루이스. 

이렇게 각각의 한 나라에 한명씩이 함께 모여 걷는 것도 정말 흔한일은 아니었다. 

많이 다르기도 했지만, 알고보면 똑같은 구석이 많은 우리들. 아마 꽤나 오래 서로를 기억하게 되리라. 


조금더 힘을 내서 알베르게로 간다.
 
시립 알베르게임에도 꽤나 시설이 좋다. 8개의 침대가 한방에 있고, 한명은 다른 곳에서 자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루이스의 마지막날을 함께 보내고 싶어했고, 그 누구도 혼자 다른곳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조금 전 우리와 합류한 아나이즈가 자진해서 다른 방을 선택해 주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 곤란한 상황이 싫어서 그냥 내가 다른방을 쓰겠다고 할까.. 라고 생각했지만, 루이스의 마지막 날이라 그러기엔 너무 아쉬웠다.
루이스도 그 상황이 싫었는지 자기가 다른방을 쓰겠다고 얘기한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왜 그런 선택을 하냐고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너의 마지막 밤인데, 굳이 그렇게 해야겠냐고, 그럼 차라리 내가 다른방을 쓰겠다 말한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것, 아무 의미 없지만 어쩐지 마지막날이라 그렇게 예민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공정하게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이 읽은걸까 ? 아나이즈가 그 한자리를 차지했다. 

어쩔수 없지라고 얘기하며, 친절한 호스피탈레로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먼저 온 케샤가 우리를 반겨준다. 

방에 짐을 풀고 씻고 왔다. 그런데 루이스와 안토넬로가 이상하다. 
알고봤더니 혼자 떨어진 아나이즈가 못내 신경 쓰였던지, 그녀의 매트리스를 우리방으로 옮겨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씻고 왔을때는 이미 그녀의 매트리스가 나와 굴리가 쓰는 침대와 루이스와 안토넬로가 쓰는 침대의 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루이스가 한 선택이므로 존중해준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많고 늘 현명한 판단을 해 주는 루이스를 따르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날이기에.. 


같은 방에는 독일인 할머니와 헝가리인 할아버지 부부가 있었다. 존과 마리안, 백발의 부부는 언제나 다정했다. 보기좋다. 
자주 마주쳤던 우리를 몹시 반겨준다. 캐나다에서 지금 살고 있다고 하는 그들은, 같은 커뮤니티에 너무 좋은 한국인들이 많다며 
나를 몹시 이뻐해줬었다. 존의 미소가 어찌나 인자하고 따뜻한지 ! 
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내게 루이스가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이 젊은 사람들과 함께 방을 쓰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를 얘기해주신다. 
루이스도 이 곳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다며, 서로 사랑하는 연인도, 부부도, 그리고 우리같은 사이도 있다고 말하며 
내 머리통에 살짝 뽀뽀를 해 준다. 우리같은 사이 ? 대체 무슨 사이 일까.. 너무 어렵다. 

원래 모두와 스킨쉽이 유독 잦은 그이기에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늘 누군가와 끌어안고 뽀뽀하고, 유럽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인은 그런 표현을 더 많이 했다. 
신기한 것은 그런 행동이 거부감이 들거나 싫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같은 사이...가 대체 무슨 사이를 의미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무슨 뜻일까? 

루이스가 발이 계속 아프다고 하더니, 그의 오른쪽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의 발은 다시 딱딱한 부츠 속으로 들어 갈 수 없을 것만 같이 부어 올라 있었다. 
슬리퍼가 없는 그에게 여분의 플립플랍을 다시 주었다. 어떻게 하면 발이 저렇게 부어 오를 수 있는지.. 걱정이다. 



날씨가 흐리다. 밤에 폭풍이 온다고 한다. 더 늦기전에 빨래를 해서 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빨래를 하러 아래로 내려간다. 
케샤와 몰리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빨래를 해 놓고 그네들 곁에 다가가 앉는다. 

케샤는 후미야가 여전히 너무 신경쓰인다. 그에게 잘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이해를 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했던 사우로는 오늘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 다음 마을까지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몹시 슬프고 심란했다.
그에게 살짝 그녀의 마음을 표현 했는데, 떠나버린 그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얘기하던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그거 알아? 라고 하더니.. 사실 자기는 폭풍이 오는 기운을 느낄수 있다고 말한다. 
우스웠지만 부드러운 울림이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꽤나 진지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에너지와 기운을 믿는 그녀는 자신을 어떤 에너지의 전령? 정도 쯤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나쁜 것은 아니니 그냥 둔다. 스무살의 그녀가 그냥 귀엽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같이 오늘 저녁을 걱정한다. 루이스의 마지막 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므로,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을 가기로 한다. 
루이스가 레스토랑을 찾아보겠노라고 밖으로 나간다. 나와 케샤가 함께했다. 

우리는 그 전에 클라라 한잔을 위해 작은 바로 향한다. 

케샤는 나보다 먼저 루이스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 때의 케샤는 언니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언니는 중간에 먼저 돌아갔지만, 루이스와는 몹시 친해졌다고 한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내일의 일정을 묻는다. 

루이스는 내일 친구들이 이쪽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아마 12시쯤 친구들이 올 것이라 말한다. 
루이스가 없이는 굳이 그 거대한 무리와 함께 걷고 싶지 않던 나는, 그럼 내일 친구들이 올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겠노라 말한다. 다리도 아파서 하루쯤 쉬고 싶다고, 내일은 6km만 걸어야겠다 생각하고서 말이다. 
사우로의 부재로 오늘이 너무 우울한 케샤는, 왠지 내일 걷기 싫을 것 같다고 나와 함께 루이스의 친구들을 기다리겠노라 말한다. 
단 둘이 남겨지지 않게 되어 고마웠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걸 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다. 

바의 주인이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소개해줬다. 
그 곳을 예약하고, 내일 먹을 약간의 빵을 사 들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산토도밍고에는 치킨이 살고 있는 성당이 유명하다. 
그래서 빵집도 기념품점도 모두 치킨을 내세우고 있었다. 치킨을 성당에서 키우는 이유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아 인간의 기억력이란 ! 여행서를 버리고 돌아 온 것이 못내 아쉽다. 



신축한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가 몹시 좋았다. 
그곳에는 순례자의 상처투성이인 발을 맛사지도 해 주고 치료도 해 주는 치료사가 별도로 있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물집을 치료하고 맛사지를 받고 상처를 소독했다. 

발톱이 신발에 치여 새빨갛게 부어오르던 중이었던 나도 줄을 섰다. 물집은 아니었지만 발톱이 점점 부어오르는게 느껴졌고, 
걸을 때 마다 몹시 고통스러웠었다. 딱히 치료법이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역시나 이건 어쩔수 없다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귀엽게 발가락에 붕대를 감아준다. 
걷다가 자주 쉬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해준다. 

모두가 하나 이상씩의 고통을 갖게 된 시점, 나 역시 피해갈 순 없었다. 






한국에서 못다 지우고 온 내 발톱의 매니큐어가 초라했다. 정말 지우고 싶은데 지울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겠지 . 발톱의 매니큐어가 조금씩 작아질 수록, 한국에 두고 온 내 모습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여행한지 두어달, 이미 나는 꽤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릎이 아팠던 안토넬로는 그 곳에 있던 치료사에게 더이상 걷지 말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무릎 연골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같은데, 그 치료사는 안토넬로에게 적어도 일주일은 걷지말고 쉬라고 말했다. 
귀국일이 촉박해 남들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걸어야 했고, 또 이 길을 무조건 끝까지 걷고 싶었던 안토넬로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의 건강을 걱정했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또한 이해 했기에 마음이 아팠다.
아프지 않고 무사히 이 길을 끝마치는 것, 그 또한 결코 쉬운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날 저녁, 루이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스무명 남짓 되었던 것 같다. 
루이스는 내 앞에 앉았다. 어쩐지 너무 왁자지껄 떠드는 저녁 분위기가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그는 모두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모두가 이별을 아쉬워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지만,
어쩐지 조금 더 소박한 저녁을 먹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나의 욕심일 뿐이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얕은 대화들을 나누고, 서로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 주며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멋쟁이 굴리가 루이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며 저녁을 모두 계산했다. 
와우, 한두명도 아닌 스무명, 200유로에 임박했을 거금을 써 준 굴리에게 모두 감사를 표했다. 
짧지만 깊은 그들의 우정이 보기 좋았다. 돈으로 우정을 판단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아름답고 보기 좋았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산토도밍고의 밤은 여전히 흐렸다.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아름다운 산토도밍고 교회 아래에서 우리는 다같이 둥글게 모여 안토넬로를 위해 기도를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만드는 기적의 힘을 믿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간절히 기도하면, 안토넬로의 아픈 다리가 좋아질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둥글게 모여 안토넬로에게 우리의 에너지를 보내줬다. 
글쎄, 예전의 나 였으면 이런게 세상에 어딨냐고 콧방귀나 뀌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했고, 나 역시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그의 건강을 빌었다. 
감동받은 안토넬로는 거의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한없이 열려 있는 따뜻한 마음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더 넓은 마음들이 그 곳에 있었다.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씻고 고민 많은 케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뒤늦게 방으로 올라갔다. 
루이스에게 마지막 굿나잇 인사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루이스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고, 아나이즈 또한 그의 곁에서 잠들어 있어 나는 그에게 갈 수 없었다. 루이스가 손을 뻗었지만, 아나이스의 매트리스가 가로막고 있어 그냥 손만 살짝 잡고 굿나잇 이라 말해줬다. 

자기전에 포옹하고 볼키스를 해 주는 것, 

지금 다시 생각하면 낯뜨겁고 민망할 수도 있을 법한 행동인 것 같다. 우리는 정말 그런 문화에 익숙치 않으니까. 
하지만 그 곳에서는 그것이 당연했고, 모두의 일상이었다.
따뜻한 마음의 표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인사, 그 만큼 훌륭한 인사가 또 어디 있으리.


그에게 꼭 마지막 볼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하고서 내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100kg이 넘는 거구 굴리가 아래에 있으니 침대가 몹시 든든했다. 내가 아무리 움직여도 절대 꿈쩍할것 같지 않았다. 

불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유리창으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워서 창문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두운 방, 그리고 나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천둥번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안토넬로의 코고는 소리. 

내 맞은편 침대 2층, 그러니 거의 나와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안토넬로는 코로 천둥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귀마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엄청난 소리. 

가뜩이나 복잡한 심경에 씨끄러운 소리까지 더해지니 나는 정말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 


한숨을 쉰 까뜨린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나도 나가야겠다 싶어 아래로 내려가다 아나이즈의 매트리스에 발이 살짝 닿았다. 
그녀의 매트리스를 밟지 않고서는 나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곤히 자고 있을 그녀의 매트리스를 밟을 수도 없어 다시 내 침대로 올라갔다. 

번개, 천둥, 빗소리, 코고는 소리, 그리고 침묵.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광경이라 생각했다. 내 정신도 혼미했고, 그 밤도 혼미했다. 



루이스... 그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겠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나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아무것도 알 지 못한채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슬펐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잠들지 못한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