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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21. 새로운 시작



2011년 9월 11일.   


Leon   >  Chozas de Avajo   |   20 Km  



소리나지 않는 편안한 침대, 조용한 방, 그리고 나만 있다는 그 자유로움 속에서 깊은 수면을 취했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느지막히 나가고 싶었지만, 갈 길에 대한 부담감과 몸에 배인 습관 때문에 
일찌감치 잠에서 깨고는 그냥 누워 있었다. 문 앞에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히데오상은 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하는 모양이다. 

일곱시 반, 평소보단 조금 늦은 시간에 나서는 걸 보니 히데오상도 푹 잠을 잤던 모양이다. 
그가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도 빨리 따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문 바닥 틈으로 왠 종이가 보인다. 


아... 히데오 상이 쪽지를 남겼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그가 내 방문 밑으로 종이를 넣는 소리였나보다. 








그는 먼저 떠나는 와중에도 나에게 이런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쪽지를 보고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는 내게도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 감사인사 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되면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리라 마음먹는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곱게 챙겨 넣고 나도 얼른 길을 나섰다. 



스페인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이 몇군데 있는데, 이 곳에도 있었다. 
파라도르, Parador San Marcos. 모든 여행자의 로망이 바로 이 호텔에 묵는 것일 정도로 이 곳은 유명했다. 
그리고 비쌌다.  그 명성에 아침부터 사진찍는 사람이 꽤 있었다. 

이 호텔에서 꼭 커피를 마시고 갈거라던 히데오상이 혹시 있나 싶어 입구에서 두리번 거리기도 했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제복을 입고 문을 지키는 경비들이 어쩐지 무서워 갈길을 재촉했다. 








대도시를 벗어나는 길, 정말 재미가 없다. 


내가 조금 늦게 나온 건지, 순례자도 거의 없었다. 그저 화살표를 따라 아스팔트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발은 오늘도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나는 아마 오늘 많이 걷지 못할 것이다. 



첫번째 마을에서 커피와 또띠야를 먹었다. 몇몇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과 같은 어린 사람은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인나언니가 처음 버스를 타고 넘어왔을때, 왜 이렇게 어린 애들이 많은지 놀랍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단지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뀌었다. 신기했다. 

단 한명의 아는 얼굴도 만나지 못했고, 어쩐지 낯선 사람과 다시 친해지기도 어려워 그냥 혼자 있었다. 


지나가는 마을에 있는 교회에 잠깐 들러 예배 드리는 것을 구경했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나는 진심으로 나의 미래를, 나의 카미노를,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내 생애 그렇게 진지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


누가 들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간절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혼자 있는 이 낯선 길에서 위안이 되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기도에 의지하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을을 벗어나서는 또 두갈래 길이 있었다. 

이번에 선택하는 길로 몇 일의 코스가 달라지게 된다. 


하나는 아스팔트고 하나는 밭길 이었다. 


당연히 나는 밭길을 선택했다. 나에겐 조금 짧다는 이유만으로 아스팔트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시간에 쫒기는 나의 친구들은 아마 아스팔트길을 선택했으리.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걸을 것이다. 


몇 안되는 순례자는 갈림길에서 또 갈라졌고, 내가 선택한 길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없으니 어쩐지 불안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고, 나는 그사람들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정말 혼자 남겨진 건 아니구나, 위안을 해가며 말이다.  









신기하게 생긴 집들이다. 언덕에 구멍을 뚫어 집을 지은 것 같다. 

원시시대 토굴의 발전된 모습이랄까 ?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런 집들은 주로 무엇인가를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 둔 창고라고 했다. 

아마 와인을 숙성시키기 위한 곳들이 아닐까? 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다가 쉬고싶을때 그냥 쉬었다. 

새끼 발가락의 물집이 너무 심해져 운동화를 신을 수가 없었다. 

플립플랍을 신고 내 페이스 대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정말 지독하게 혼자 인 날이었다.

아니, 그 많던 순례자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권 가지고 있는 산티아고 안내서에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정보가 쓰여 있었다. 


책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지금 몇키로미터를 걸었는지 세는 것을 멈추고,

다음 마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멈추고, 그냥 그렇게 걸었다. 



다음 마을에 있는 공터에서 어제 만든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치즈와 초리소를 넣고 만든 샌드위치였는데, 치즈와 초리소를 잘못 고른 모양이다. 

가뜩이나 치즈와 초리소에 약한데, 하필 고른 녀석들이 가장 악독한 녀석들일줄이야.. 


그 샌드위치를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다. 

히데오 상이 걱정이다. 처음만든 샌드위치가 이렇게 맛이 없다면 상처받지 않을까 ? 


그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 





지루하고 끝없는 길을 혼자 걸었다.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혼자 영어로 지껄여보기도 했다. 

내 걸음은 느리기만 했고, 태양은 나 하나만 비추고 있었다. 



막상 혼자가 되니 조금 두려웠다. 알베르게를 정하는 것 부터가 고민이었다. 


20km를 걷고 나타난 마을, 입구에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알베르게를 두고 고민 하다가 

오른쪽에 있는 예쁜 잔디가 있는 알베르게를 선택했다. 



커다란 방에 수십개의 침대가 있는 알베르게였다. 

이미 일층 침대는 다 차고 없었다. 햇볕이 잘드는 이층 침대 하나를 맡아서 짐을 풀었다. 


20km 밖에 안걸어서 그런가 씻고 나와도 4시가 채 안된 시간이다. 

슈퍼마켓은 아마 씨에스타라 문을 닫았으리.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다가, 문득 오토상 생각이 났다. 

그에게 편지를 써 두고 다음에 만나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 맨 뒷장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쓰다보니 한장이 가득 찼다. 이 편지를 꼭 그에게 전해 줄 수 있길 빈다. 



밖으로 나가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알베르게가 3개, 바가 1개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바에 들러 클라라 한잔을 마셨겠지만, 혼자서 스페인 아저씨들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지키고 있는 바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루이스가 생각난다. 나에게 클라라를 가르켜준 사람. 

나는 아마 이 길이 끝날 때 까지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빵집에서 초코빵을 한봉지 사고 수퍼마켓에 들러 바나나와 내일 먹을 쿠키를 샀다. 

조그만 구멍가게 수준이라 별로 살만하게 없었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먹어야 겠다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려는데,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오며가며 몇번 마주쳤던 키가 큰 외국인이었다. 이그나시오의 일행이었는데, 

나의 젊은 친구들이랑은 아는 사이였지만 나랑은 통성명도 하지 않았던, 얼굴만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너무 반가워, 나는 그에게 몹시 반갑게 인사하고야 말았다. 


썬글라스가 잘 어울렸다.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대충 캐나다나 영국에서 왔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지내는 알베르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알베르게에 있다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먹을 저녁 재료를 사기 위해 수퍼마켓에 왔다고 했다.

 

키크고 잘생긴 백인. 하지만 내 친구들의 친구였고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큰 맘 먹고 혼자 떨어져 나왔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나중에 보자고 인사하고 수퍼마켓을 돌아 나왔다. 

혼자인 게 외로웠지만 막상 친구들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참 이상한 마음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왠 스페인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어디론가 들어간다. 


대장장이의 헛간처럼 생긴 곳이다. 박물관처럼 꾸며놓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구석 구석 돌아다니며 자신의 전시품들을 보여줬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왠 지하실로 나를 데려 갈 때는 왠지 살짝 무섭기도 했었다. 

하지만 담담히 아무렇지 않게 따라 가서 와인을 저장하는 창고와 땅에서 파낸 그릇들을 구경했다. 


수십종류의 전화기도 있었고, 아주 오래된 책들도 있었다. 

우표도, 동전도 있었다. 정말 수집광이신 할아버지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내 사진을 찍어주겠노라며 나를 세우고, 앉히고, 또 전화기를 들려주며 포즈를 취하게 했다. 

영어 단어를 말해가며 나와 소통하려 애쓰는 그 할아버지가 나쁜사람 같지는 않았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스페인 할아버지들은 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1951년에 찍은 자기 사진이라며 전깃줄에 매달려있는 좀 신기한 사진을 보여줬다. 

정말 할아버지 맞느냐는 질문에 자랑스럽게 그렇다고 하셨다. 


아니, 어떻게 전깃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지 ??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사진이다. 





다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방명록을 써 드리고 2유로짜리 동전 하나도 통에 넣어 드렸다. 

그걸 위해 나를 끌여드린 걸 수도 있지만, 내가 구경한 것들이 그정도 가치는 충분이 되는 듯 했다. 




숙소로 돌아와 빵을 먹으며 알베르게에서 주는 저녁식사를 신청했다. 

정말 이 알베르게에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정말 외롭긴 했다. 

차라리 내일부터는 더 많이 걸어서 숙소에 늦게 도착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가만있는것 보단 걷는 것이 나으니. 



저녁은 베지테리안식 빠에야였다. 야채밖에 안들어 있는 죽, 정말 맛이 없었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밥을 먹은 프렌치 어르신들과 이런 저런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프랑스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알베르게에서 준 와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이야기했다. 


옆에 앉은 독일인 아줌마들과도 얘기를 좀 나눴다.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라 어르신들은 몹시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 ! 그때 저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우리 친구들과 그래도 자주 함께 다녔던 콜린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도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콜린이 나에게 와인을 한잔 하겠냐 묻는다. 



Sure ~ 



콜린은 나에게 친구들은 다 어디갔냐고 물었다. 

나는 레온에서 하루 더 있었고, 그 친구들은 지금쯤이면 아마 아주 멀리 가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만남과 이별이 당연한 길이기에 다들 그냥 묻고 만다. 

같이 있으면 좋은거고 아니면 마는거다. 그게 바로 이곳 . 


아무튼 와인 한 잔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됨에 감사했다.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독일에서 온 게하트 할아버지와, 미국에서 온 한 아주머니도 합류했다. 

맨체스터 출신인 콜린은 그냥 누가 봐도 영국인이었다. 








영국인 아저씨와 미국인 아줌마의 속사포 같은 대화를 들으며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저녁때 먹었던 정말 맛 없었던 하우스와인에 비해 슈퍼에서 파는 3유로 짜리 와인은 정말 맛있었다. 


미국인과 영국인의 대화에 끼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영어권에서 온 사람들은 타인의 영어실력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하다. 

그들은 늘 빠르게, 문법은 생략하고, 낯선 단어들을 써서 이야기한다. 거기에 억양까지 더해지니.. 정말 !@#$%


아무튼 독일에서 온 영어를 잘 못하는 게하트 할아버지는 물집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는 내 발에 티트리 오일을 발라줬다. 

이걸 바르면 붓기가 좀 가라 앉을거라며, 언제든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 .









마법사 같이 생긴 게하트 할아버지는 독일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 온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는 이미 3개월이 넘게 걷고 있었고, 그의 배낭에는 생존을 위한 온갖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무려 18kg의 배낭을 메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그의 가방에는 커다란 돌맹이도 하나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그 돌맹이를 이 길 위에 내려놓기 위해 걷고 있는 중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있는 철 십자가 아래에 집에서 가져 온 돌을 내려 놓으면 

자신이 지금껏 저질러 온 죄를 내려놓고 오는 것이라는 내용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는 그 죄를 내려놓기 위해 큰 돌을 올기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신기하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큰 죄가 있어 집에서부터 돌을 가방에 넣고 몇달을 걷고 있는 것일까? 



저마다 사연을 하나씩 가지고 이 길을 걷고 있다지만, 게하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축에 속했다. 나도, 미국인 아줌마도 깜짝놀라 기겁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달은 크고 밝았다. 맑은 밤하늘과 밝은 달을 바라보며 우리는 감동했다. 

그리고 조금 둘러 가는 이 길을 선택한 것에 아주 만족했다.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우리는 깊어가는 밤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로운 하루였다. 혼자임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 


쌀쌀해 지는 밤공기에 다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순례자들은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일기를 조금 더 쓰다가 귀마개를 꽂고 자려고 누웠다. 
엄청나게 씨끄러운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한숨쉬는 소리가 들려오고, 
결국 참다 못한 누군가가 코고는 사람에게 가서 뭐라 이야기 한다. 


게하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해비급 스노어들은 별도 관리가 들어가야 한다고 혼자 생각하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이 방 안의 다른 순례자들과 
두번쨋날 밤에 있었던 코골이 소동을 생각했다. 

웃음이 났다. 짜증이 나야 정상인 상황인데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어쩐지 우스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코골이에 신경쓰느라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잠을 자기 몹시 힘들었었다. 
하지만 좋은 일들을 생각하며 그냥 혼자 웃다보니 그 씨끄러운 코고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신기한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