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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라이프/glowing day

자유인, 그 첫번째 날




2011년 6월 1일,

나는 5살 이후로는 처음으로 타이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그리고 지금은 그냥 나.
그냥 나.. 라고 하긴 좀 그렇고, 백수라고하기도 좀 그래서 자유인으로 칭하기로 했다.


자유인이 된 첫날 아침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일찍 일어나는 3년간 몸에 밴 습관덕에 7시에 일어나고야 말았다.

사회인의 마지막을 과하게 기념하느라 어젯밤 과하게 마신 술 때문에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배는 빈속에 콜라먹고 놀이기구 탄 것마냥 난리고, 비는 주룩주룩 오고 얼굴은 팅팅부어있었다.

아........................ 정말.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나보다.

하나씩 어제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괴로워진다. 어젯밤 2차 맥주집 화장실 거울로 봤던 내 모습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속 떠오른다... 심했다. 너무.. ㅠㅠ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난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되고, 예정된 일들이 있으므로 움직여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나의 백수됨을 축하해주는 건가,, 라고 혼자 히히덕 거리며 장화를 신고 집을 나왔다 .


한달전 내가 자유인이 되기로 결정하는데 한 몫을 한 신체적 이상 징후에 대한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다.
몸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아픈(아프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아무튼 난 아프고 괴로웠다.)몸을 이끌고 병원엘 갔다 .

예상했던 내로 내 심장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갑자기 30여만원의 치료비가 머리에서 맴돌았지만, 3개월 할부로 처리해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을 해본다.





늘 걷던 길이었다. 늘 회사 얘기를 하며 깔깔대며 지나가던 익숙한 동네..
왠지 그냥.. 기분이 그랬다.

속이 안좋아 혼자 맥도날드에 가서 치즈버거를 먹었다. 과음한 다음날이면 어쩐지 느끼한게 먹고싶다.

회사 점심시간이 되어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나왔다. 우리는 해장을 한답시고 쌀국수집엘 갔지만,
나는 치즈버거 때문인지 왜인지 별로 먹지를 못했다.


내 기억에서 부분 부분 지워진 내용을 동생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괴롭다.....


사실 내 어렸을 적 별명은 울보였다.
아무것도 아닌일에 너무 잘 울어서 사람들이 늘 울보라고 불렀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슬픈 이유가 있어서 우는데, 사람들이 너 대체 왜 우냐 라고 하면 할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왠만하면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게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가 없게된다.
참을만큼 참을 수 있을때는 울지 않지만, 그 참을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서 나는 울게 되는 거니까 ,
한번 터지면 멈추기가 여간 여러운 것이 아니다.

어제 내 눈은 피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빨갛게 충혈됐었고, 얼굴은 완전 팅팅 부었었다.
그렇게까지 울어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데, 아무튼 나는 아주 심하게, 것도 흉하게 울어댔다.......

예쁘게 울고 싶은 로망이 있는데, 자꾸 나는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처럼 울게 된다.
흉하다... 예쁘게 울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회사동생을 만나 어제의 일들을 듣는데, 왈칵 또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참느라 힘들었다.


창피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동생과 헤어졌다. 늘 붙어다녔던 아인데, 많이 힘들어 할 것 같아 내 마음도 아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나의 길을 가야한다.


해가 떴다... 땅도 말랐다... 내 장화는 꼴이 우스워 졌다.......




마른하늘에 장화를 신고 , 이렇게 강남을 헤집고 다녔다.

-_- ... 장화가 양말 같다. 암튼 비오는 날에는 몹시 유용하다.
종아리 까지 내내 더워서 힘들었다.

접이식 장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면 접어서 올려서 신고, 날씨가 맑아지면 접어서 내릴 수 있는 ..

누가 발명 안해주나 ? 내가 해봐?? ㅎ






나는 그렇게 , 마른 하늘에 장화신고 씩씩하게 창조적 부적응자를 만나러 갔다.

창조적 부적응자, 그에 대해서는 수식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패스 하겠다.
아무튼 나의 절친한 선배이자 조언자, 혹은 오래오래 함께 갈 동행자 ? 정도인 사람이다.

만나면 언제나 유쾌하다.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꿈을 이야기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같이 고민을 할 수 있어 행복하고, 서로 잘 되길 빌수 있어 따뜻하다.

그래서 참 많이 고맙다고,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아직 말은 못했다. 좀 그렇다. 다음에는 꼭 말해야지.


많은 얘기를 했다. 서로의 미래에 대해, 꿈에 대해.. 서로에게 함부러 조언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냥 들어주고, 잘 되길 빌어준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그 상황이 와봐야 깨닫게 된다는걸 우리는 둘 다 안다.
미리 걱정하고 조급해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그래서 그냥 잘 되길 빌어줄 뿐이다.
참 욕심많은 우리 두 사람이 잘도 만났다, ㅎ





서점에 갔다.

 



서점에 오면 나는 행복해진다.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고, 책을 보는 것도 좋고, 책 특유의 그 냄새도 좋다.


이렇게나 책이 많은데, 나는 언제 다 보나 싶기도 하고, 이런 책을 한번 써 봐야 할텐데 싶기도 했다.



이번엔 왠지 사랑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사랑에 대한 책들을 가볍게 훝어보다가,
어쩐지 옛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써 놓은 책들이 궁금해 졌다. 쇼펜하우어와 헤르만헤세를 찜 했다.

이젠 책을 마음껏 사서 볼 순 없으니까, 도서관과 서점을 자주 애용해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앉아서 책 한권을 반쯤 보다가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내려 놓았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지만 숙취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음주+감정억제실패 의 시너지 효과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다.
간만에 찾아온 멘탈붕괴사태에 나는 무방비로 당하고야 말았다. 제길 !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꼭 오늘을 기록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무섭다. 하루하루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이 무섭다.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선 안될 것만 같다.


내 결심을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다.

마음 먹은대로 이루어 지도록,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나는 나를 채찍질 할 것이다.

길고도 짧았던 자유인으로의 첫날을 기록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시간을 기록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오래오래 남겨 놓을 것이다. 나중에 내가 나를 잊지 않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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