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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라이프/glowing day

네번째 날




2011.06.04.



어느 집이든 하나씩의 문제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너무 행복하고 이상적인 것 처럼 보이는 집안의 철없는 딸로만 보였던 내 친구는
사실 알고보면 집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무서워 한다.

그 부모들의 육아 방식을 나무라기엔 조금 주제 넘지만,
친구를 볼때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건 어쩔수 없다.

자식의 자존감은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일텐데, 대체 어떻게 했길래 천성이 밝은 이 아이의 자존감을
이토록 낮춰버렸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나이 스물 일곱. 캥거루 족.

사실 나는 자식을 부모 배에서 나가지 못하는 캥거루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부모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릴때 부터 대학 졸업 하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살 생각 하지 말라고 가르친 집에서 자란 나는 
그 친구네 부모님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다.

자식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게 가르키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자 의무가 아닐까?
대체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혼자 결정하지 못하게끔 자식을 키울 수 있는지 되려 궁금할 지경이다.
학교도 직업도, 심지어 남자도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 그 친구 부모님을 한번 만나뵈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너무 쉽게 자살을 선택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너무 걱정스럽다.
행여나 이 친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왠지 조바심이 난다.

결론적으로, 꽤나 진지하고 행복했던 우리의 밤이 이 친구에겐 또다른 악몽의 시작을 불러오게 되어 몹시 유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시급한 과제는 이 친구가 그 집에서 빠져 나와 물리적으로 독립하는 일 같다.

나 마저 멀리 떠날 예정이라 조금 걱정스럽긴 하지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친구를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야 집에 들어온 나는 두시간 가량 선잠을 청하고 오늘 있을 나이키 우먼 7K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해본다.
밤샘과 피곤을 빌미로 함께 참가 하기로 한 친구에게 날 태우러 집까지 오라고 한게 실수였다.

연휴의 첫날이었던 오늘은 정말 끔찍히도 차가 막혔고, 하마터면 우리는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할 뻔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집을 출발한 그 친구는 4시간 30분만에 운전대를 놓을 수 있었고, ㅎ
마라톤이 시작하기 전에 겨우 경기장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마음은 불안했지만, 그래도 차에 함께 있으니 그것 또한 재밌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과는 대부분 지속적인 관계 유지가 힘들다고 한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공유하던 일상이 사라지고 나면, 공통된 화제를 찾기가 어려워 멀어지는게 아닐까.

그래도 멀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률 낮은 희망에 의지해본다.







느지막히 대회장에 도착하는 바람에 사진 찍을 시간도 거의 없었던 우리는
출발선에서 기다리는 동안 잠깐 찍은 몇장의 사진만을 남겼다.

나는 3600번, 저기 뒤에 쪼끄맣게 보이는 도니는 4444번, 

샤샤샤샥 뛰라는 4444번, 왠지 웃긴 번호다. ㅎ
번호표를 가슴에 붙이고 둘다 왠지 기분이 좋아 웃어버렸다.
 
그래도 무사히 온게 너무 기쁘고 다행스러웠고 기특했다.

막판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는데 정말 오길 잘했다!

어제 그렇게 무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계속 남았지만, 그래도 좋게 생각해주는 도연이 때문에 미안함은 한결 나아졌다!

사람은 역시 긍정적이어야 한다.









20대 여자 6천명이 같은 옷을 입고 동시에 뛰는 마라톤은..

정말.... 조금 징그러웠다.


길은 좁아서 뛰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빽빽했다.


역시 20대 여자들 답게,
뛰면서 사진도 찍고 화장실도 가고 전화도 하고...

셀카도 찍고 남자친구가 옆에 계속 따라 다니며 뛰는모습 걷는모습 쉬는모습을 찍어주기도 했다. 구경하는게 재밌었다.

정말 각양각생의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 많은 사람들과 나는 그래도 마라톤에 도전했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6천장이 7분만에 매진된 걸로 봤을때, 아마 다들 보통 성격은 아니
지 싶다. 내가 그렇듯이 :)

서울 시내에 있는 나름 액티브한 20대가 거의 다 모인것이리라 생각하니 그들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져,
하마터면 옆에서 달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뻔 했다. =_= ; 






올림픽 공원 한바퀴, 7K . 경사가 살짝 있었고 아스팔트 길도 있었지만 그래도 뛸만 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추월하는 재미도 있었고 함께 뛰니까 혼자 뛰는 것 보다 훨씬 할만 했던 것 같다.

스코어도 나름 만족스럽다. 다음에는 10K 짜리를 도전해 봐야겠다 !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었다.
물론 나는 몸 컨디션을 핑계로 편하게 올 수 있었지만, 수면 부족과 체력 저하로 인한 피곤이라 앉아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만 켜져 있는 조용하고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많은 얘길 했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이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얘기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질 수 있길 빌게 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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