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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23. 현명한 선택


2011년 9월 13
일.  
 


Astorga   >  Foncebadon   |   25 Km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잔뜩 사 놓은 식량들이 걱정이다. 
혹시 아틸라와 함께 먹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넉넉하게 준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복숭아 2개, 사과 2개, 계란 6개, 참치, 그리고 빵. 

과일 4개만 해도 상당한 무게였기 때문에 일단 아침에 많이 먹고 나서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내려가다가 아틸라를 만났다. 
아침을 먹고 가겠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조금 걸은 다음 밖에서 뭔갈 먹겠다 얘기한다. 


" 그래 그럼 먼저 가, 나는 아침먹고 갈게. 부엔카미노 ! "  


그는 뭔가 할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별 말 없이 나갔다. 나중에 볼수 있으면 보자고 하고서. 

과연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혼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조금 늦은 시간이라 주방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제부터 먹고 싶었던 계란후라이를 두개 만들어 빵과 함께 먹었다. 간만에 먹는 계란이 너무 맛있었다. 
남은 계란은 두고가기 아까워 어제 사 둔 참치와 버무려 또띠야를 만들었다. 
그리고 바게뜨 빵에 끼워 넣으니 아주 훌륭한 투나 또띠야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치즈와 초리소를 넣은 샌드위치보다 훨씬 훌륭했다. 

짐을 싸고 테라스에 앉아 해가 떠 오르는 것을 구경했다. 
아침 일출은 언제나 내 기분을 설레게 만든다. 


아스토르가에 있는 성당을 보기 위해 늑장을 부렸는데, 
결국 나는 성당엘 들리지 못하고 아스토르가를 떠나고야 말았다. 


어제 물집을 치료 한 발은 아직 나은 상태가 아니었다. 
어제와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고통이 전해져왔다. 찢어놓은 살갖에서 느껴지는 아픔이리라. 

치료되는 과정이라 그런지 더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순례자들이 날 스쳐지나갔고, 나는 오늘도 거의 마지막 순례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길 위에 돌로 화살표가 만들어져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을 지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이 돌을 건드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 놀랍다. 

아마 이 화살표를 처음 만든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몹시 뿌듯해 했으리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걷는 길인가 보다. 

아니면, 이 길위에서는 모두가 아름답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놀라운 길 임에는 틀림없다. 



나와 자주 맨 마지막 순례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부부와 또 마주쳤다. 

그들이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많은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나와 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걷곤 했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 반갑다. 




4km 정도 가면 나오는 다음 마을까지 가는데 거의 한시간이 걸렸다. 

새끼발가락의 고통을 느끼면서 걸었는데, 아무래도 이 고통은 줄어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다음 마을 벤치에 앉아 복숭아와 사과를 먹었다. 몇십그램 이겠지만 가방을 조금 가볍게 해야했다. 



뜨거운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오전이지만 그래도 꽤나 뜨겁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길을 걷는다. 이 다리로 오늘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틸라는 얼마나 갔을까? 





두번째 마을 입구에서 왠 스페니쉬 아저씨 한명을 만났다. 


꼬레아나 ~ 라고 하면서 반가워 해 주시더니, 마을에 가면 바가 두개가 연달아 있는데, 

두번째 바가 자기 친구의 것이니 그 쪽에 가서 쉬어 달라 얘기했다. 지능형 호객행위다. 

아저씨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은 첫번째 바는 나도 피하고 싶어서 두번째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자 커피를 한잔 마시고, 어제 함께 저녁을 먹은 스페인 순례자 한명을 만났다. 


휴가로 이 길을 걷고있는, 절대 빨리 걷고 싶지 않고 무리하고 싶지 않은 순례자였다. 

함께 쿠키와 호두를 나눠먹고, 그녀는 먼저 출발했다. 










바람 한 점 안부는 뜨거운 날이다. 바닥은 메말라 있었고, 내 발끝에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빨리 말이다. 


오전에는 고통에 집중 했는데, 이번에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거의 시속 6km의 빠른 속도로 나는 많은 순례자들을 제치고 걸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 뿐이었다. 



'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



수없이 되뇌였다. be wise. 


앞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수많은 선택들 앞에서 내가 더 나은 선택을 언제나 할 수 있길, 

덜 후회하는 길을 고르고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길, 



이 길이 끝나면 나는 또 무수히 많은 선택 앞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사실 나의 미래를 찾기위해 찾아온 길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아직 아무런 미래도 찾지 못했다. 

내일도, 모레도 걷는다 라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내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이 길 위에서 내가 살던 세상의 미래를 찾는다는것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이리.  

그것을 이 곳에 와서야 깨달았을 뿐. 


후회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길 빌었다. 정말 간절히 빌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져가는 듯 했다. 너무 빨리 걷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쉴 수 없었다. 

쉬었다가 다시 걸을때의 그 고통을 알기에 버틸수 있을 때 까지 버티고 걸어보자 생각했다. 


어쩌면 빨리 걸어가서 아틸라를 찾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일찍 출발한 아틸라를 아주 천천히 걸어온 내가 따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일부러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어쩐지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만 같았다. 




2시간 30분을 쉼없이 걸었다.  새로운 기록이 생겼다. 이렇게 긴 시간을 휴식없이 걷다니 ! 



긴 걸음 뒤의 휴식은, 내가 걷던 길에서 살짝 왼쪽으로 들어가야 있는 순례자의 나무 였다. 

이 아주 오래된 나무 그늘아래에서는 전통적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쉬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 그 곳에는 단 두명의 순례자만 있을 뿐이었다. 



기타를 치는 남자와, 요가를 하는 여자.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그늘 안에는 많은 생명체가 있었다. 다들 그늘이 필요했나보다. 



쉼없이 바삐 걸어온 길 옆으로 이렇게 평화로운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내 옆을 여전히 정신없이 지나가는 수많은 순례자들을 보면서, 

내가 마치 그들과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오늘 어디까지 가기로 정해놓고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었다.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다들 바삐 가는 중이다. 


한걸음만 멈춰서서 살짝만 빗겨나보면 또다른 세상이 있는데, 그것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앞으로, 앞으로. 목표를 향해 앞으로만 나간다. 


왜 우리는 돌아보지 못하는가 ? 



기타치고 요가하는 이 평화로운 공간을 왜 저들은 보지 못하고 바삐 지나치는가. 


왜 나는 쉼없이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고, 무엇에 쫒기듯 취직하여 기계처럼 살아갔던건가. 

왜 나는 잠시도 옆을 돌아보고 쉬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순례자들의 길이 아닌 우리네 삶이었다. 


어쩐지 슬픈 기분이다. 





슬픈 마음을 떨쳐내고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깐의 휴식으로 내 발은 다시 고통을 되찾았다. 다행이었던 건 그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20km쯤 온 것 같다. 일단 알베르게의 씨에스타 시간이라 마을에 있는 바에 들렀다. 


오렌지쥬스를 시키고 아침에 싸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 바에서는 와이파이가 사용가능했다. 야호 ! 

간만의 와이파이에 한국에 전화도 걸고, 친구들에게 연락도 해 본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료로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는 이 세상이 신기했다. 정말 스마트폰은 놀랍다. 




한참을 그러고 놀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예쁘장한 금발 아가씨가 말을 건다. 


"Hi "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귀여운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아틸라를 아느냐 물었다. 



"응, 알어. 헝가리에서 온 키큰 남자 말이지 ? " 

" 응 맞아. 그가 다음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달래." 




예상치 못한 메모였다. 그는 이 곳에서 나를 기다리다 내가 오기 십분쯤 전에 떠났다고 했다. 



아! 어쩌면 그를 만날수도 있겠구나. 



메세지를 남겨준 그가 고마웠다. 사실 이번 마을에서 쉴 것인지 한시간을 산을 올라야 하는 다음 마을에 갈 것인지 고민중이었는데,

그의 메세지로 인해 나는 다음 마을까지 더 가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넘어야 하는 높은 산을 오늘 반쯤 올라가는 거라 

내일 걷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금발의 소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의 메세지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주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힘이났다. 


이건 정말 모순이다. 하지만 어쩔수없다. 내 마음이 그러한걸 어쩌겠는가. 




빨리 산을 올라가 아틸라를 만나고 싶었다. 산이 시작되려는 찰나, 한 무리의 프렌치 들이 입구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들보다 내가 앞서가야겠노라 생각하고 나는 서둘러 길을 걸었다. 


중간에 있는 작은 샘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쉬고 싶어서 그랬다기 보다 물을 먹는 벌들을 발견하고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벌들도 물을 먹는구나 ! 









하긴, 벌들도 물을 먹어야 겠지. 


물 마시다 말고 날 공격하진 않겠지 ?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노는 동안, 예닐곱명의 프렌치 아줌마 아저씨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맙소사, 이 중년의 프렌치들은 걸음이 너무 느렸다. 

그리고 매너없이 좁은 산길을 두세명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가고 싶지만 그들을 제치고 가게 될 것 같아 나는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오르막길은 몹시 가팔랐고, 그 곳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은 내 발에 너무 큰 무리였다. 


작은 틈을 노려 내가 그 사이로 지나갔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니까 조금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멀어져 나도, 그네들도 편안하게 걷게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날 따라오는 발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를 쫒아 오는 듯 했다. 난 멀어지고 싶은데 자꾸 가까워지는 소리가 나서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따라오는 발소리도 더 커져갔다. 짜증이 났다. 나를 추월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냥 걸었다. 발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 지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날 치고는 앞으로 뛰어갔다. 오 마이 갓 ! 그러고는 돌아서서 웃기 시작한다. 

뒤 따라 오던 프렌치 아저씨들도 웃기 시작한다. 나를 치고 가 놓고 한마디 양해나 최소한의 사과도 없이 말이다. 


얼굴이 팍 썩었다. 어쩔수 없다. 이렇게 무례한 순례자는 완전 처음이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같은 순례자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이 너무 화가났고, 나를 비웃는 듯한 그들의 행동에 분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혼자 속으로 욕을 하며 길을 걸었다. 

나에게 말을 걸면 이렇게 말을 해 주겠노라 준비해가며 말이다. 


가만보니 그들을 따라 저 아래쪽 차도로 밴 한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배낭이 없다고 했어 !!!  이런 짝퉁 순례자들 같으니라고 !!! !@#$#%$^%$



그들은 쉬어갔고, 나는 계속 걸었다. 화가나서 그냥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산 중턱쯤, 폰세바돈 이라는 버려진 마을이 나타났다. 


아주 예전에 버려진 이 마을에는 주민들이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저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가 세 곳 있을 뿐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저 곳에 아틸라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저 알베르게로 가야겠다 마음먹고 길을 올라가다가 

콜린과 폴, 마르쉘, 그리고 어제 저녁을 함께 먹은 스페니쉬 순례자 아이티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그들은 자기네들이 묵어가기로 한 알베르게에 한자리가 남았다며, 오라고 얘기했다. 


그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아틸라도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 한자리가 남았다는 말에 어쩐지 마음이 급해서 덥썩 가방을 내려놓았다. 

침대가 있는 자리는 다 나가고 없고, 나는 별관을 개조해서 만든 듯한 커다란 방에 있는 매트리스를 배정받았다. 

요가원 같은 느낌의 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나는 방이었다. 


이 곳은 직접 야채를 길러 음식을 제공해주고, 아침에는 요가수업도 하는 알베르게였다. 

소와 닭이 사람과 함께 걸어다니는, 아주 특이한 알베르게였다. 


삐걱대는 침대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간만에 맡는 향내도 좋았다. 하지만 아틸라는 그 곳에 없었다. 



씻고 난 뒤, 아틸라가 이 곳에 없을 뿐더러 그들 중 누구도 아틸라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몹시 좌절했다. 

나에게 메세지를 남겨준 그를 찾고 싶었다. 그 역시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였다. 


하지만 이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마을에서 그를 어찌 찾을 수 있으리. 


오늘은 만날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사과 하나를 들고 혼자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 마을을 걸었다. 



저 쪽 잔디위에 마르쉘이 속옷만 입은 아이티를 마사지 해주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저런 모습들이 나에게는 아직도 조금 충격이다. 


자연스레 아, 저 둘은 커플인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마는.. 어쩔수 없는 한국인이다.





무너진 돌집을 따라 돌아 길을 걸었다. 묘한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헤이 ~ 지니 ! "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아까 마을 입구에서 본 그 이쁜 테라스에서

아틸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다시 만나고 말았다. 정말 너무 반가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 아 ! 너 거기 있었구나 ? 기다려 내가 거기로 올라갈게 ! " 



내려오려는 그를 말려두고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새로 생긴 알베르게였다. 


그 역시 내가 마지막 한자리를 등록 한 알베르게에 들렀었는데, 한자리가 남아있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남은 한 자리를 자기가 가지면 내가 올 자리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그의 모든 친구들이 그 곳에 있어서 당연히 너도 있을 줄 알고 그 곳에 짐을 풀었노라 말했다. 


그는 오늘 얼마나 천천히 걸었으며, 모든 마을의 바에서 얼마나 오래 쉬었는지를 이야기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늦게 도착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는 그에게 나의 하루를 이야기 해 줬다. 


나 역시 두시간 반을 쉼없이 걸었노라고, 그리고 메세지도 잘 받았노라 얘기했다. 

하루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났다. 









마을에 있는 캘틱 레스토랑에서 둘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정말 특이한 분위기의, 특이한 노래가 나오고, 특이한 옷을 입은 종업원이 서빙을 해 주는 곳이었다. 


가격이 조금 비쌌지만, 하루쯤은 호강하자 생각하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15유로 정도였던 것 같다.) 



뭐... 소가 유명한 지방이라 그랬지만 내가 생각했던 스테이크는 아니었다. 

이런 거대한 스테이크는 생전 처음이었다. 









사이즈에 압도당했다. 


아틸라와 나는 저 엄청난 고기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막상 먹으면 커다란 뼈에 붙어있는 살이라 사진에서 처럼 엄청나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간만에 먹는 고기, 그리고 정말 간만에 둘이서 먹는 분위기 있는 저녁. 왠지 낯설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들었다. 

그는 직업을 그만두고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러 이 길을 온게 맞긴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엄청난 것이 있었다. 


그는 합기도를 15년 했다. 그리고 요가를 3년을 했다. 

아이키도 마스터였고, 요가 구루였다. 그는 氣 를 믿었다. 에너지를 알고 우주를 믿었다. 


아이키도는 타인의 에너지를 운용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가는 자신의 에너지를 운용하는 운동이다. 


그 둘을 동시에 마스터 경지에 이를 정도로 하다보니 내면의 에너지가 충돌하여 혼돈(?)이 왔다고 했다. 

그는 이 몸안의 엄청난 에너지를 다스릴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것을 찾아 헤매다 이 길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누가 들으면 말도안된다 욕할 법한 이야기들을 했다. 하지만 그는 몹시 진지했고, 나는 그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야기는 실로 몹시 흥미진진했다. 

나는 기운이니 에너지니 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그 세계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아마 내가 관심을 보이고 많은 질문을 했기에 그가 이런 모든것을 얘기했으리. 

그 전까지의 그는 꽤나 과묵한 남자였으니 말이다. 



아틸라가 새롭게 보였다. 그는 자신은 사람의 에너지를 조금 볼 줄 아는데, 

나는 아주 드물게 맑은 기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말해줬다. 


빈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는 그의 말을 모두 믿었기 때문에 갑자기 맑은 기운을 가진 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스터로 모시겠습니다. 많은 것을 알려주십시오." 



내가 처음 접한 세계, 이렇게 가까이서 그런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정말 신기했다. 





저녁을 다 먹었다. 다 먹진 못했지만 꽤나 많이 먹었다. 

배가 너무 부른게, 아마 오늘 저녁에 탈이 날 것만 같다.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그는 담배를 말기 시작했고, 나는 벤치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과 구름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 

하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구름은 떠돌아 다니는 생각일 뿐 실체는 없다고, 

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구름을 다 없애고 맑은 하늘을 되찾으려 많이 애쓰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다 이해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둥실 둥실 떠다니던 구름이 갑자기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구름. 



그렇게 하트는 하늘위에 한참을 떠 있다가 조금씩 일그러져 사라졌다. 




때론 자연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저 순간은 온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올랐다. 


이런 광경에 감탄하고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사진에는 잘 찍히지 않았지만, 이 하늘빛과 핑크빛의 그라데이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아름다웠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틸라와 나는 테라스로 올라가 밤하늘을 감상하기로 했다. 


이미 테라스 소파에는 몇몇 순례자가 둥근 보름달과 별들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뜻한 핫초코 한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밤이되니 제법 추워졌다. 

아틸라가 방으로 들어가 침낭을 가지고 왔다. 커다란 그의 침낭을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 덮고서는 까만 밤 속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그냥 멈춰있는 것 같은 밤이었다. 그냥 까맣기만 한 정지된 세계. 




그와는 반대로 내 뱃속은 완전 요동을 치고 있었다. 간만에 먹은 고기에다가 폭식을 하는 바람에 탈이 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틸라가 옆에 있어서 나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ㅠㅠ 나는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동양인이니까 말이다. 



"지니,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 난 괜찮은데. 기왕 있는거 편하게 있자. " 



라고 말하며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그의 팔은 내 어깨를 모두 감싸고도 남았다. 



" 응 괜찮아. "



사실 조금 놀랬지만, 지금상의 경험으로 이 정도 스킨쉽은 친구사이에도 하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라는걸 알고있었다. 

 동양인에게는 어려운 유럽인들의 생활방식.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결 따뜻하다. 간만에 느끼는 사람 체온에 기분이 좋았다. 

 에너지가 넘친다던 그는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차가운 나와는 완전 반대였다. 기분좋은 따뜻함이다. 


그 상황을 실컷 즐기고 싶었지만... 내 뱃속이 정말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아 이제 돌아가야겠다. 알베르게 문 닫겠어. "



알베르게 소등시간이 되기 전에 나는 테라스에서 일어섰다. 아틸라가 배웅을 해 준다. 

문 앞에서 그가 볼인사를 하려다 멈칫하고는 그냥 잘 가라고 얘기한다. 


아까 저녁먹을때 볼인사가 처음에 얼마나 낯설었는지를 잠깐 이야기 했었는데, 

어쩐지 그래서 그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엽다. 




"아, 나 내일 너랑 같이 걷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


내일 우리는 집에서 가져온 돌맹이를 내려놓는 아이언 크로스를 지나게 될 예정이었다.

어쩐지 그 곳은 혼자 지나기 싫어 그에게 내가 먼저 얘기했다. 

그도 그러고 싶노라며,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숙소로 데리러 가자고 얘기하고 헤어졌다. 



알베르게를 돌아 나왔다. 뱃 속에 가득 차 있던 가스를 조금 방출하고 (^.~) 심호흡도 크게 해 가며, 

빨리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어갔다. 


어라 근데 앞에 뭐가 있다. 









소다. ㅠㅠ . 소가 밤에 풀을 뜯고 있다. 


그래 오늘 낮이 좀 많이 뜨겁긴 했지. 




정말 깜짝 놀랐다. 무서워서 혼났지만, 소는 나를 해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니 폴과 마르쉘,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스페니쉬걸이 와인을 마시고 있다. 

어디갔다 오냐는 물음에 아틸라와 보름달 구경하고 들어오는 길이라 얘기하고, 와인 권유에는 노땡큐로 답했다. 




내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이미 불 끄고 모두 잠든 뒤였다. 


속이 너무 안좋아 소화제를 하나 꺼내 먹었다. 고기먹고 소화제 먹는 순례자라니, 완전 넌센스다. 



아틸라의 온기가 아직 내 어깨에 남아있는 듯 했다. 

신비로운 남자. 어쩐지 그에게 점점 호감이 간다.



"니가 여기 있으니 한결 나아." 

" It's much better that you are here."



낮에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테라스에 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나 역시. 



니가 함께 있으니 한결 나아. 



same a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