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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20. 안녕 친구들




2011년 9월 10 일.



Leon




엄청나게 커다란 알베르게에서 잠을 편하게 잘 순 없었다. 

사람이 많은만큼 소리도 많다. 


나는 오늘 걷지 않을 예정이다. 걷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잠을 설쳤다. 

이런 이유로도 잠을 설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능한한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니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꼭 다시 만나자. 내가 부지런히 쫒아 갈게." 



그렇게 나는 기약없는 약속을 하고, 친구들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산드라는 나에게 초콜렛을 줬고, 시몬도 숨겨놨던 초코빵을 줬다. 고마웠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쉬기로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발가락 상태도 몹시 안좋았다. 

플립플랍을 신고 걷기조차 힘들었고, 그 발은 나의 하루의 휴가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듯 했다. 



히데오상도 남기로 했다. 그는 다리가 너무 아파 레온에서 몇일 쉬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 알베르게에서 몇일을 더 지내겠다던 히데오상이 호텔을 찾아 나서는 나를 따라 나섰다. 

알베르게, 싸긴 하지만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는 불가능한 곳이다. 나는 하루라도 편히 쉬고 싶었다. 



그와 함께 맨 마지막으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그래도 아침 8시 밖에 되지 않았다. 

알베르게는 보통 8시 퇴실, 밤 10시 소등을 규칙으로 하고 있었다. 

대도시 답게 이른시간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있었다. 물론 한국의 아침에 비할바는 아니다. 

다른 마을에서는 몇몇 순례자를 제외한 시민을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 비해 사람이 많아 보였을 뿐이리. 


숙소 정보가 전혀 없는 우리는 9시에 문을 여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문을 연 카페테리아를 찾아들어가 커피와 츄러스, 그리고 크라상을 주문했다.  

초코에 찍어 먹는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츄러스, 정말 맛있었다 ! 



참 마음이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분명 혼자이고 싶었지만 혼자이지 않음에 안도했다. 



그와 함께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의 한국 생활 이야기들, 한국과 일본의 차이들, 뭐 그런 이야기들을 나눈 것 같다. 



9시가 되었고, 우리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향해 나왔다. 그리고 길에서 정말 우연히 인나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를 먼저 알아 본 것은 히데오 상이었다. 



"어 저기 그 한국인 아닌가요? "


"아, 맞네요 ! 인나언니 ! "



간만에 보는 한국인이 반가웠다. 밥 한번 같이 먹지 못한게 끝내 아쉬웠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 어찌나 반갑던지 ! 


언니는 엊그제 이 곳에 도착을 했고, 이미 이틀을 이곳에서 지낸 뒤 이제 막 떠나려는 참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언니가 묵었던 45유로짜리 싱글룸이 있는 호텔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그 호텔은 방에서 와이파이 사용도 가능하다고 했다.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고 언니를 잡았지만, 언니는 갈 길이 멀었고 이미 아침을 먹은 상태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시 만나기 힘드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언젠간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서로의 길을 축복해주었다. 부엔 카미노 ! 



히데오상과 나란히 옆 방을 배정받고 올라왔다. 일단 각자 조금 쉬고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방은 작았다. 하지만 작은 욕조와 혼자에겐 넉넉한 침대가 있었다. 얼마만의 싱글룸인지 !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직 내 몸에 울긋불긋하게 남아있는 배드버그의 흔적들이 

뜨거운 물에 닿으면 결코 좋을 것 같지 않아 간단히 씻고 말았다. 

때도 좀 밀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내 몸은 온통 붉게 부어 오를 것만 같아 참았다. 


씻고나서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메일이 왔을까 ? 약간의 기대를 품고 메일함을 열었고,


그 곳에는 새 메일이 반짝이고 있었다. 


따뜻함이 가득 담긴 루이스의 메일,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있는 그의 마음이 바로 전해져왔다. 

서로를 알게된 지 거의 20일, 함께 한 것은 일주일 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의 아낌없는 사랑에 고마웠다. 그는 이미 굴리의 블로그에서 내가 배드버그에 물렸다는 사실을 읽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 도와주지 못함을 아쉬워 하고 있었다. 


나의 방황을, 내 머릿속의 새를 날려 보낼 수 있도록 그는 포르투갈에서 큰 힘을 보냈다. 




... don´t control much your thoughts, but remember who you are, why you are here, 
and follow your intuition and be totally responsable for your choices. 
Than miracles can happen in your life.
You are living a beautiful choice, congratulations! ....

We only can fly if we became ourselves light.




천천히 그의 메일을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그의 마음을 읽었다. 
그의 미소가,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되살아 나는 듯 했다.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답장을 쓰려던 찰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히데오상이었다. 휴대폰을 닫고 나는 히데오상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비행기 티켓을 출력해야 하는 히데오상은 시내에 있는 프린트 샵으로 갔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를 도와 프린트를 출력하고, 레온 대 성당 내부를 구경했다. 레온 대 성당은 정말 아름다웠다. 







괜찮다고 하는 나를 세우고 히데오상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저맘때 쯤 나는 사진 찍는 것 자체에도 회의가 들어 거의 사진을 찍지 않고 있었는데, 

그가 찍어준 이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레온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맙다. 



성당을 둘러보고, 다 떨어져가는 내 플립플랍을 대신할 새로운 플립플랍을 하나 샀다.

 다 떨어져 가는 썬크림도 다시 하나 장만했다. 순례자가 아닌 사람들 틈에 끼여 쇼핑을 하는 기분이 어쩐지 낯설다. 


쇼핑을 하고, 우리는 그나마 밥에 가까운 점심을 먹기 위해 치노(chino / china) 레스토랑을 찾아 헤맸다. 

스페인에는 그 많은 일식 레스토랑도, 원래 드문 한식 레스토랑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명한 관광지들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꽤나 먼 길까지 걸어가서야 우리는 치노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고, 프라이 누들과 볶음밥을 주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 


처음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가 이야기 했고 나는 들었다. 

인생을 오래 살아온 만큼 풀어 낼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리. 


지금까지는 그저 2년 뒤에 아내의 생일 선물로 여행을 할 계획인데 답사를 하러 이 곳에 왔노라 이야기 하던 히데오 상의 

숨겨놓은 이야기들이 하나 둘 꺼내져 나왔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길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에 그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고 있는지를 이야기 했다. 


36살, 띠동갑. 그는 나에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리.

그는 감정을 참으며 말을 했지만, 울고 있는 듯한 그의 마음이 느껴져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아픔이, 그의 고뇌가, 어쩌면 그의 것만이 아닌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뇌가 느껴져 마음이 아파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줄 알았는데 은퇴와 함께 하루아침에 모든것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40년간을 바쁘게 일해온 그가 출근 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평생을 너무 열심히 일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차가웠던 그가 이 곳 카미노에서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이고 이제서야 이 길을 오게 된 것이 아쉽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길에 있게 된 것에 너무 감사한다 말했다. 


우리네 삶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고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 

조금만 돌아보면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 건지. 

그의 이야기가 남의 것만 같지 않아서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갈 길일지도 모르니까.. 


일본인들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얼마나 조심스러워 하는지를 잘 알고 있던 나로써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꺼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를, 그의 진심을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난생 처음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도 36살이나 어린 한국인 여자애한테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허탈하게 웃음지었다. 


아마 내가 어리고,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인에게는 결코 할 수 없을, 그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말이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나는 그에게 점심에 대한 답례로 오렌지 쥬스 한잔을 대접했다. 

그리고 우리는 갓 짜내온 그 오렌지 쥬스를 정말 맛있게 마셨다. 








쥬스를 마시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우리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루이스에게 긴 답장을 썼다. 


be alone. 나의 새로운 홀로서기를, 새로운 각오를 알렸다. 
어쩌면 그 것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일과도 같았다. 나의 마음을 더 굳게 해 주는, 나에게 쓴 편지. 

마지막으로 그와 헤어지고 발견한 PEACE&LOVE가 씌여진 십자가 사진을 첨부하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가족들에게도 메일을 보내고, 간만에 만난 인터넷의 세계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막상 무엇인가를 쓰거나 할 순 없었지만, 간만의 친구들과 한국 이야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다섯시쯤 되어 우리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사 ! 오늘이 토요일이라 모든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겨우 문을 아직 닫지 않은 슈퍼마켓을 찾아 내일 먹을 음식과 저녁에 마실 와인을 한 병 샀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와인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한 매일 밤 싸고 질좋은 스페인 와인을 마시려 했다.
식성이 비슷한 사람과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오는길에 레스토랑에서 빠따따 또띠야를 하나 먹고, 치노샵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오상의 방에 자리를 잡고 내일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는 카미노를 하면서 처음으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늘 먹을 것을 사먹기만 했던 그에게 내가 만드는 샌드위치는 신기하기만 했었던 것 같다. 나를 따라 샌드위치를 만드는 그의 손놀임이 어색하다. 
그는 평생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며, 지금 이 모습을 자신의 와이프가 본다면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이라 얘기했다. 

샌드위치를 싸고 남은 음식과 와인을 먹었다. 우리의 긴 대화는 방에서도 이어졌다. 
그의 아들들과 손주들, 그리고 이제서야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아내 이야기까지 우리는 함께 나누었다. 

예전의 그는 다정한 남자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너무도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이고 아버지 였다. 
헌식적으로 내조 한 그의 와이프의 얘기를 들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그녀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도 나중에는 이런 사랑을 하며 남편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 병원까지 다녀온 그는 몇일을 더 쉬어가려 했지만 내일 출발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는 산티아고까지 꼭 걸어서 가고 말겠다 다짐했다. 


아들의 보이스카웃 뱃지에서 떼 내어 가방에 붙여놓은 " Never give up " 이라는 문구를 자랑스레 보여주며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저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을거에요 ! 









하루 종일을 그와 함께 보냈다. 


생각해보면 카미노 첫 날이었던 오리진에서부터 나는 그와 쭉 함께였다. 

때론 서로를 보지 못한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늘 다시 만났고,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도 나도 우리는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길이 어긋나게 되더라도 또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역시 나를 언제 어디서나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늘 든다고 했다. 

아무런 기약없이 만나게 되고, 반가워 하고, 또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느낌이다. 이 길위에서만 가능한 일들. 



와인 한 병을 둘이서 나눠먹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다. 두둥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혼자 있는 이 조그만 방이 좋다. 




오늘 밤은 정말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이 길위에서 만난 수많은 보석같은 사람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