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8일.
늘 일찌감치 출발하는 히데오상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살짝 눈을 떠서 방을 둘러보고 다시 눈을 감는다.
조그맣고 조용한 방에서 꽤나 푹 잔 밤이다.
팔다리는 여전히 간지러웠지만 어제 스페니쉬 부부로부터 받은 연고 덕에 많이 좋아졌고,
비닐 커버를 씌워둔 침대 였기에 배드버그가 기어다니는 듯한 환상에서도 자유로웠다.
히데오상이 간간히 히안한(한숨을 쉬거나 소리를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정도는 애교로 봐줄만하다.
엄청 심하게 코를 골 것 같은 아이슬란드인 굴리는 의외로 소리없이 잠을 잔다.
그가 요가강사인 것 만큼이나 놀랍다. 그는 여러모로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다.
히데오상이 먼저 출발하고 나는 일어나서 씻는다.
까뜨린도 금새 일어난다. 굴리는 언제나 가장 늦게 알베르게를 나선다.
우리가 나올때까지 그는 자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우리의 어린 친구들은 출발하고 없는 듯 했다.
까뜨린과 함께 바에서 커피과 바나나를 하나 먹고 우리도 출발했다.
오늘도 우리는 31km라는 긴 여정을 선택했다. 아니 그들은 선택했고, 나는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반드시 레온이라는 도시에서 묵어야 했는데,(이 도시는 우리가 지나가는 카미노의 모든 도시들 중 가장 크다.)
여기서 70km인 그 도시에 모두들 내일 도착하길 바라고 있었다.
시간이 많은 나는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그냥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레온에서부터는 혼자 다시 시작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오늘도 날씨는 끝내준다.
오늘의 목적지인 엘 부르고 라네로에 가기 위해서는 두개의 길이 있었다.
밭두렁을 따라 걷지만 조금 둘러가는 길과, 도로를 따라 걷지만 조금 짧은 길.
우리는 오늘도 밭길을 선택한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같은 밭을 트랙터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지나간다.
사람은 없다.
앞서거니 뒷서가니 하며 걷는 까뜨린과 나, 그리고 간간히 마주치는 농부들.
안토넬로가 잠시 나타나 함께 걷다가 또 홀연히 사라졌다.
다리가 긴 안토넬로의 큼직한 걸음걸이를 우리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
정말 더 이상은 파랄 수 없을 만큼 파란 하늘이다.
하늘빛이 신비롭다.
이 신비로운 푸른 하늘 아래, 내가 걷고 있다.
노란 화살표는 길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이 노란 돌들을 가져다가 이렇게 이쁘게 화살표를 만들어 둔걸까?
까뜨린과 나는 오늘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서로 그저 묵묵히 길을 걸었다.
그녀를 앞서게 했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갔다.
내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왜 오늘 31km나 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결정을 번복하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생각을 하는터에 길은 더 멀었고 다리는 더 아파왔다.
이미 내 마음은 관대함을 잃어버린듯하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계속 하게 되는 이 상황을 나 자신이 받아들이질 못한 것이리.
걷다가 힘들면 우리는 쉬었다.
쉴 때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한 기분을 까뜨린도 느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터벅터벅 걷는 길 위로 노란 화살표가 계속 나타난다.
정말 궁금하다. 누가 이렇게 가져다 놓은걸까 ?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스페인에서 이 카미노는 꽤나 큰 관광상품이기 때문에
카미노가 지나가는 각 지역구마다 담당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일은 카미노의 상징인 노란 화살표가 지워지지 않도록 늘 관리하는 것이며
이 노란 화살표에 장난을 치거나 가짜 화살표를 그리는 행위는 범죄에 포함되서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짜화살표도, 흐릿하게 망가진 표지도 없었던 것이었다.
꽤나 괜찮은 관광 상품이다.
까뜨린과 내가 걷고 있는 길의 왼편으로 왠 파라솔이 보였다. 캠핑카도 보였다.
한 스페니쉬 가족이 씨에스타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부럽다고 얘기하며 그들을 지나쳐 가려는데 그들이 우리를 부른다.
"Hola ! "
그리고 우리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까뜨린이 날 쳐다본다. 나도 까뜨린을 쳐다본다.
Why not ?
그렇게 우리는 낯선 스페인 가족의 작은 씨에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
...
모자장수와 삼월토끼의 테이블에 앉게 된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역시나 그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늘 스페인어가 아쉽다.
손짓발짓 다해가며 까뜨린은 독일에서 왔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 나이많은 스페인 어르신들이 꼬레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지진을 이야기 하는 듯 했다. 그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으리.
그저 하퐁(Japan), 씨 ~ (Si) 라고만 얘기할 뿐...
그들은 우리에게 직접 만들어 온 케이크와 포도, 그리고 커피를 주었다.
뜨거운 태양빛아래 미지근해진 포도와 뜨거운 커피였지만 감사히 받아먹었다. 우리가 먹는게 좋은지 계속해서 먹을 것을 주는 통에 곤란할 지경이었다. 말이 안통하니 호의를 받는것도 쉽지 않았다. (사실 먹으면 배탈날것 같은 상태의 음식들 이었다..ㅠㅠ)
사진을 찍자는 말을 힘겹게 알아듣고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내가 찍어려고 하니 한사코 같이 찍어야 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모두가 사진에 들어와야 해서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어쩐지 웃긴 상황. ㅎ
아하! 카메라에 타이머를 맞춰놓고 나도 와서 앉았다.
다들 이 타이머가 되는 카메라를 신기해한다. 스페인의 어르신들, 어쩐지 정겹다.
사진은 엉망으로 나왔지만, 추억은 이렇게 남겨졌다.
사진이 엉망으로 나온것도 모르고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 즐거웠다.
이미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 중이어서 사진이 이상하니 다시 찍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갑자기 한 할머니가 무엇인가를 우리를 향해 막 이야기를 했다.
또 힘겹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소를 줄 테니 사진을 보내달라는 이야기 인 듯 했다.
"Si !"
그리고 나는 나의 작은 노트를 할머니께 건넸다.
제대로 들은게 맞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한참을 적고는 나에게 노트를 들려줬다.
사진을 꼭 보내주겠노라 말하고 노트를 본 순간, 나는 당황하고야 말았다.
당연히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메일이라기엔 너무나 긴 글이 적혀 있었다.
..
맨 끝에 Espana 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집주소였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맙소사 ! 집 주소를 적어 주실줄이야 .. 우습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메일을 적어달라 할 수 없었고, 그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를 다시 써달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메일이 있을리 없잖아 ?!
당연히 이메일 주소를 적어 줬으리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만 즐거운 상황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 할머니의 필체조차 해석해내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사진을 보내드릴 수 있을까 ? :(
음식을 먹고 사진까지 찍은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일어서겠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안토넬로가 나타나길 빌며 길 끝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어쩐지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야호 ! 굴리다 !
우리는 굴리를 불렀고, 그 역시 흔쾌히 우리쪽으로 왔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사진을 한번 찍고는 걷는 걸 멈추고 싶지 않노라며 길을 나섰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우리도 굴리와 함께 길을 나섰다.
"무챠스 그라시아스 ~ "
아쉬움에 한참을 손을 흔들어주는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기분이 한결 유쾌해졌다. 카페인의 힘일까?
아니. 아마 그 순박한 스페인 어르신들의 따뜻한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졌기 때문이리.
다음 마을에서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벌써 다섯시.. 내 마음은 이 곳에서 쉬어가길 너무도 원하고 있었지만, 다음 마을까지 가겠다는 까뜨린의 의지는 강력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일 레온에 가겠다는 의지가 강력한 것이다. 오늘 여기서 멈춰버리면 내일은 48km라는 정말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거리가 나오기 때문에 오늘 더 걷자는 것이었다. 그래.. 일단 좀 쉬고 생각하자 !
마을에 있는 조용한 바에서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스페인의 오렌지 주스는 생 오렌지를 직접 그자리에서 짜서 주기 때문에 정말 맛있다 !
그리고 그 바에서 먹은 오렌지주스는 내가 여행하면서 마신 모든 음료들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한잔에 4유로, 커피나 물에 비해 몹시 비싸긴 하지만 오렌지가 10개 가까이 들어가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
쥬스를 마시고, 뜨거운 발을 신발에서 꺼내 조금 쉬게 하면서 연고를 찾았다.
아뿔싸 ! 호주머니에 넣어 둔 연고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까 스페인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흘리고 온 모양이다.
까뜨린도 나도 너무도 안타까웠다. 까뜨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마을에서 똑같은 약을 꼭 사자고 얘기하며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연고가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갑자기 팔이 간지러운 것 같다.
그 신비한 연고의 덕인지 붓기도 많이 가라앉고 간지러움도 많이 좋아졌었는데, 이렇게 그 연고를 잃어버리다니.. 바보 . :(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팔의 모습. 온 팔이, 온 다리가 저 상태였다. 흉칙하다.
나는 팔이 심하게 물렸고 까뜨린은 다리가 심하게 물렸었는데,
그녀의 다리는 부츠에 짓이겨져 물집이 생기고 터진데다가 벌레에 물리기까지 해 정말 엉망이었다.
나보다 훨씬 아파 보이는 까뜨린이었지만 늘 한숨만 쉴 뿐 괜찮다고 말했기에 나도 괴로워 할 수 없었다.
고통을 나눴기에 아마 서로 쉽게 이겨 낸 것이리.
우리는 더 늦기전에 마지막 7km를 걷기로 했다.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 졌다.
기왕 걷기로 한거 즐거운 마음으로 걷자는 마음이 들어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그저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흥이난다.
까뜨린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살짝 그늘이 있는 편편한 길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는 까뜨린에게 내 힘을 보내주자 혼자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장풍을 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면서 길을 걸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걸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길 가의 벤치에 까뜨린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말한다. 같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저 쪽 길이 아닌 곳의 나무 뒤에서 한 순례자가 나타났다.
까뜨린에게 감기약을 줬던 이그나시오 였다. 그는 교정기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기 쉬웠다.
서로 간단히 안부를 묻는다. 그도 반짝이는 눈과 예쁜 미소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수많은 순례자들의 따뜻한 눈과 미소가 너무 좋다.
이그나시오는 먼저 출발하고, 그가 저 멀리 작게 보일 때 쯤에 우리도 출발했다.
해가 꽤나 많이 기울었다. 서두르자고 얘기하고 내가 앞서 걸었다.
지루한 걸음이 이어졌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사장을 지났다.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힘들었지만 계속 노래를 불러가며 이 상황을 이겨내려 애썼다.
꽤나 많은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은 그저 걷기만 했을 때 보다 빨리 흐르는 듯 했다.
마을이 나타났다. 야호 !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까뜨린이 주저앉아 버렸다.
" Are you okey ? "
괜찮지 않다고, 여기서 잠깐만 쉬어가자고 그녀가 말한다.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더니 여기가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고통이 가득했다.
오마이갓 ! 일단 가방을 풀고 물을 좀 마시고 편안하게 쉬라고 얘기하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우리는 얼마든지 시간이 많이 있으니 걱정말고 편안하게 쉬다가 가자고 얘기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녀는 연신 숨을 내뱉었다.
그 가슴의 통증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쉬어야 할 때 그녀는 쉬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고통을 호소한 것이다.
숨이 탁 막히는 그 가슴의 통증. 왜 그녀는 미련하게 그 상태가 될 때까지 걷기만 했던 것일까 ?
이제 가도 괜찮겠다는 그녀에게 다시는 이런 바보같은 짓 하지 말라 이야기했다.
알겠노라고 대답한다. 한살 차이나는 것도 언니라고 내가 언니노릇 하려나 보다. 우습다.
켄따루와 후미야를 만났다. 하지만 그들이 묵기로 한 알베르게에는 빈 침대가 없었다.
그 숙소의 친절한 호스피탈레로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라라구나 라는 알베르게를 소개해주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는 그곳으로 바로 발길을 돌렸다.
라라구나에 들어섰을때 우리는 막 씻고 나오는 굴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케샤, 몰리, 토마스가 우리를 반겨줬다.
오늘은 정말 못만날 줄 알았다고, 어떻게 이렇게 많이 걸어왔냐고 놀라며 반겨주는 몰리.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몰리는 언제나 큰 리액션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포옹과 뽀뽀는 기본이다.
얼굴도 마음도 너무 예쁜, 정말 사랑스러운 열여덟 소녀이다.
다들 약해빠지고 많이 걷기 싫어하는 까뜨린과 내가 오늘도 31km를 걸으리라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네들이 머뭇거리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왤까 ?
일단 우린 체크인을 하고 오겠노라 말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호스피탈레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를 찾으러 내가 마을로 나섰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바에서 그녀는 나중에 올 것이니 그냥 짐 풀고 쉬고 있으라는 바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 그냥 짐을 풀었다. 그저 얼른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씻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기에 호스피탈레로를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될대로 되라지 싶은 심정으로 짐을 풀고 몸을 씻었다. 개운하다.
이름도 특이한 라라구나는 아름다운 잔디정원이 있었지만, 침대가 있는 방은 무슨 창고에 침대만 쌓아 둔 것 처럼 허술했다.
꼭 배드버그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의 숙소였다. 그 침대에 눕는 것 만으로 몸이 다시 간지러운 듯 했지만 뭐 어쩌리 !
씻고 정원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케샤와 몰리가 다가와 저녁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른 순례자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초대를 했는데 우리가 올 것을 미처 예상치 못해서 우리의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노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서 아까부터 뭔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나보다.
괜찮다고, 우리는 나가서 사먹으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준다. 까뜨린과 함께인 것이 오늘도 고맙다.
굴리가 밖으로 나와 요란스럽게 물집을 치료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요란스럽게 안토넬로와 시몬, 샤샤가 등장했다.
그들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짐을 풀고 드러누워 버렸다. 씨끄러운 이탈리아노 들의 등장으로 정원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안토넬로를 우연히 만난 시몬과 샤샤는 형님인 그의 말만 믿고 그를 따라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방향감각이 부족한 안토넬로 덕에 길을 잘못들어 무려 10km나 둘러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유쾌한 그들의 등장과 씨끄러운 그들의 무용담으로 금새 분위기는 흥겨워졌다.
이탈리아노들은 정말 언제나 열정적이다.
까뜨린과 나는 약국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책에는 분명 이 마을에 약국이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작은 마을을 온통 뒤져도 약국은 없었다. 한 마을 주민이 약국이 없다고 얘기를 해 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약국을 찾아 내일 가야할 길을 미리 갈 뻔 했다.
약국을 포기한 우리는 저녁을 먹기위해 레스토랑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해 다른 숙소를 찾아가던 굴리와 마주쳤다.
그 순간, 굴리는 아주 멋진 사진을 찍었다.
까뜨린과 나, 그리고 그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아름다운 사진이다.
지는 해를 뒤로 한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순례자 메뉴를 시켜놓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다.
주로 한국과 독일의 사회, 경제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졸 취업자의 한달 평균 임금이라던가, 커피 한잔의 가격과 같은 우리 또래들이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
정말 할 이야기가 없을때 나누는 지루한 대화들. 그리고 그 마저도 끊기고 났을때, 우리는 그저 침묵속에서 밥을 먹었다.
까뜨린은 그렇게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도 이곳에서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기 때문에,
들어주는 두사람만이 함께 있는 이 자리는 조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자리가 사실 나는 너무도 불편했다. 꽤나 친하다고 생각한 까뜨린인데
몇날 몇일을 그녀와 단 둘이 있다보니 이젠 할말도 없고 무슨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하자니 언어의 장벽이 있고, 또 이야기하자니 피곤했다.
우린 조용했지만 내 마음은 끝도 없이 복잡해져가고 있었다. 그녀도 혹시 그랬던 건 아닐까?
이 날 우리사이에서 해는 졌고, 나는 까뜨린과의 이별을 결심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마을은 주황빛 가로등 아래서 깨끗하고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깨끗한 남빛 밤하늘과 주황빛 가로등의 부드러운 불빛이 내 마음에 보드랍게 다가온다.
아직도 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고, 그들과 함께함에 감사했다.
하지만 어쩐지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감 혹은 불필요한 구속으로 작용하고 있는듯한 이 작은 그룹에서
나는 나의 길도, 나의 정체성도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이스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다.
나는 고독했고, 역설적이게도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현실이 나를 더 그러하게 만들었다.
내일 레온에서부터는 꼭 다시 혼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혼자가 되어 길을 걸을 생각에 어쩐지 다시 설레인다.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몇일 전 부터 조그맣게 방울이 맺히는 듯 하더니 오늘은 꽤나 커졌다.
어두운 방에서 바늘과 실로 물집을 살짝 터트렸다.
찌릿한 느낌이 발끝에서 전해져온다.
내일은 41km, 지금까지 걸었던 거리 중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그 까만 밤과 노란 별에 또다시 감탄하며,
(매일매일봐도 전혀 지겹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굿나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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