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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27. 트리니티.



2011년 9월 17일.   


Las Herrerias    >   Triacastela   |   27 Km  






너무나도 긴 밤이다. 어슴프레 동이 터 오는 듯 하다. 
아침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아주 조금 밝아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내 눈에 아틸라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자고 있는 것 같다. 고개를 다시 돌린다. 내 몸은 아침이 되어가도 여전히 미칠듯이 가렵다. 
내 살갗은 몹시 뜨거웠고 그 아래 뼛속은 차디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피로와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하다. 이 상태로 오늘 어떻게 걸을 것인지가 걱정스럽다. 

시계를 보았다. 다섯시다. 
몸을 살짝 돌려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어떤지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에게 안겨 쉬고 싶었다. 
혼자서 너무 힘든 싸움을 한 긴 밤이라 지칠대로 지친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밤새 거의 움직이지 않느라 힘들었던 내 몸은 살짝 옆으로 돌려 놓으니 편안함을 느낀다. 

눈을 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내가 깨어있는건지 자고 있는건지 구분이 안가는 몽롱함을 즐긴다. 


아틸라의 손을 잡아볼까 ? 그러면 뭐라고 할까 ? 


루이스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내 손을 잡고 껴안고 뽀뽀하고 했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틸라는 달랐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접촉이 별로 없었다. 툭 하면 끌어안는 다른 유러피안들과 다르게 말이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우리는 그 흔한 볼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막 하고 있을때 아틸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헉. 그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눈이 마주쳤다. 웃는다. 나도 웃는다. 



내 마음을 읽은건가 ??



옆으로 돌아누운 그가 한쪽 손을 밖으로 꺼내 내쪽으로 두었다. 

아니, 밖으로 꺼내져 있던 내 손을 그가 잡은 건가 ?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아니면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손이 밑에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손은 뜨거웠고 작은편이 아닌 내 손을 모두 감쌀만큼 큼지막했다. 


우리의 손이 맞닿은 그 순간, 나는 그와 닿은 그 부분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고통으로 차갑게 식어있던 내 몸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믿을수 없지만 정말 그랬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 만큼 부드럽고 강한 에너지.

어떤 주황빛 에너지가 내 몸 구석구석 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에너지 앞에서 밤새 나를 괴롭혔던 배드버그의 흔적들은 소리없어 사라졌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몸을 조금 더 돌려 누웠고, 반대쪽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나의 양쪽 손은 기도하듯 포개어졌다. 그의 두꺼운 손을 감싸고서 말이다. 


아틸라가 그의 담요 끝자락으로 우리의 손을 덮었다. 


그리고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한시간쯤 잤을까 ?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부지런한 히데오상이 또 가장 먼저 일어나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가렵지 않았을 뿐더러 온 몸이 엄마품에 안겨있는 듯 편안했다. 


아직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의 손을 다시 꼭 잡고, 두 눈을 감고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쉬어야 했고, 그러기엔 그의 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내 상태를 아는건지 그 역시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에너지를 계속 보내주었다. 


잠을 잘 순 없었다. 하지만 휴식하고 있었다. 방전된 배터리가 충전되는 듯한 느낌.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을 빼고서 말이다. 






우리가 일어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명의 자고 있는 순례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이 아님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설 채비를 했다. 


내 몸은 어느때보다 개운했다. 정말 마법같은 아침의 경험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내 몸 가득 차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 바깥에 방치해 둔 우리의 소독 된 짐들을 꺼내 다시 챙기고 조식을 먹으러 주방으로 갔다. 

폴이 막 나서려 하고 있었다. 마르셀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마르셀???? 그 남아있던 한명의 순례자가 바로 마르셀이었다. 맙소사 ㅎ 이런 잠꾸러기 같으니라고 ! 

우리는 방으로 돌아가 아직 자고 있는 마르셀을 깨웠다. 그가 깜짝 놀라 일어난다. 

시계를 보고 한번 더 놀란다. 이미 여덟시가 넘어 있으니 놀랄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놀랄만큼 잘 잤노라며 감탄한다. 

이 마을의 맑은 공기와 어떤 좋은 기운이 우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다 떠나가고 난 알베르게는 조용했다. 

그리고 여유를 찾은 리차드와 그의 여자친구도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다섯명이서 먹는 조용하고 편안한 아침식사, 

아침은 블랙브레드와 잼, 버터, 그리고 커피 등이었다. 정말 훌륭한 블랙 브레드였다.


어젯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간지러움.. 그리고 나의 양쪽 팔은 아주 심각할 정도로 붉게 부어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걱정한다. 리차드의 여자친구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일을 가져왔다. 

뭔가 아주 강렬한 허브의 향이 느껴졌다. 

그녀는 늘 이 오일을 몸에 발랐고, 그 뒤로는 모기조차 그녀를 물지 않았다고 했다.

리차드는 그녀의 윤기나는 피부의 비결이라 얘기하며 아마 도움이 될 거라 말한다. 


믿져야 본전이라고 하기엔 나는 밑질것도 없었다. 

고맙다고 받아들고는 바를 수 있는 모든 곳에 오일을 발랐다. 


부디 이 오일이 효과가 있길 !  









리차드와 그의 여자친구, 


내가 지금까지 만난 호스피탈레로들 중 단연 최고였던 사람들이다. 


유쾌하고 솔직하며 사랑을 알고 행복을 즐겼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이 알베르게 역시 모두에게 최고의 알베르게 였을 것이다. 



조그만한 주방의 벽면에는 하나에 5유로씩 파는 목걸이들이 걸려 있었다. 

뭔가 특이해보이는 문양들이 많았다. 그 목걸이들은 그녀가 직접 동물의 뼈를 갈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와우 ! 이런 엄청난 물건을 사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너무 예쁜 것들이 많았다. 나에게는 어쩐지 낯선 심볼들이었지만 그 것들은 캘틱 심볼들이라고 했다. 

꽤나 여러번 들었던 말이다. 캘틱.. 그리고 나는 감사의 뜻으로 아틸라에게 목걸이를 하나 선물해야겠다 생각했다. 



"아틸라, 내가 너에게 이 목걸이 하나 선물하고 싶은데 괜찮아? "


"와우 정말? 그럼 나는 너에게 하나 선물할게."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목걸이를 골라주기로 했다. 내 것을 고르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트리니티라고 불리우는 문양을 골랐다. 


삼위일체, 혹은 세가지를 의미하는 트리니티는 지금의 우리에게 딱 맞는 문양이었다. 


나는 밖으로 퍼지고 있는 트리티니를, 아틸라는 안으로 감싸지고 있는 트리니티를, 

마르셀은 불꽃처럼 동그랗게 말려있는 트리니티를 골랐다. 셋이서 함께 산 트리니티, 어쩐지 너무 좋은 조합이다. 



아틸라보다 네살이 많은 마르셀, 그는 늘 어른같이 인자한 얼굴로 우리에게 미소지었다. 

개인적으로 마르셀 같은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잘생겨서 그렇겠지만..  


아무튼 그와 아틸라, 그리고 나. 셋이 함께임이 기쁜 아침이다.









너무 좋았던 라스 헤레리아스의 알베르게.

만약 내가 이 길을 다시 걷게 된다고 하면 꼭 다시 찾을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뒤늦게 우리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록빛 싱그러움과 물의 맑음이 공존하는 아주 상쾌한 아침이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진입함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찾을 수 없었던 푸르른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내 목에 걸려있는 트리니티의 힘일까 ? 아니면 오늘 아침 아틸라로부터 받은 에너지의 힘일까?

나는 여느때보다도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아틸라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겠노라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오르막길을 걸었다. 갈림길이 나왔다. 동전을 던졌고, 아스팔트길이 당첨되었다. 

흙길이면 어떻고 아스팔트 길이면 어떠하리 ! 기쁨의 에너지로 충만한 세 사람에게 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와우 ! 저길 돌아봐 ! "



마르셀이 외쳤다. 그리고 우리의 눈 앞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이었고, 경험이었고, 그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감동하는 기쁨,

사람과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 엄청난 감정들 앞에서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기적, 적어도 그 순간은 우리 셋이 함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나눈, 그로 인해 더 큰 기쁨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말이다. 




한시간쯤 걸어 온 오르막의 중간쯤에 있는 작은 바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또 다시 프레야를 만났다. 

그녀와도 꽤나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이렇게 계속해서 마주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제 프레야가 묵었던 마을에는 아주 특이한 브라질리안 스타일의

알베르게가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책에는 그 곳이 아주 특별하다고 되어 있어 그 곳에서 묵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 곳은 깨끗하지도 않고 음식도 정말 너무 독특해서 먹을수가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아무튼 그녀는 불평을 했지만 그녀의 불평 역시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녀만의 특이한 화법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모든 것이 우아하고 뭔가 섹시해보인다.

 

정말 별일이다. 나 역시 그녀의 too strong한 섹슈얼 에너지를 느끼는 건가 ???....!@#$@%$%  



마르셀은 말로만 들었던 프레야를 실제로 만나게 되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듣던대로의 이미지와 같다며 살짝 얘기해준다. 



아틸라가 혼자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옆으로 다가 갔다. 



"아틸라,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에 내가 느낀 그 느낌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를 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잡아 준 손 덕분에 한시간이라도 잘 수 있었고, 그 한시간이 내겐 정말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었노라 말한다. 

정말 고맙다고, 네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걷고 있노라고, 


그리고 그는 빙긋이 웃어준다. 










나, 프레야, 마르셀, 아틸라. 



나이로치면 나보다 훨씬 많은 어른들, (생각해보니 프레야는 우리 엄마보다 4살이 어릴 뿐이다 !)

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모두 너무 좋은 친구였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나는 마르셀과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해 본건 처음인 것 같다. 


그는 홀란드에서 왔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나 하고 있다고 했다. 

사업이 조금 잘 안되고 있는 중이었고, 스스로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자친구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채 

산티아고엘 왔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노라 이야기한다. 


어쩌다가 이 길에 오게 되었고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길에 이 기간에 있어야 할 운명이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때가 된 것임에 공감했다. 

그리고 서로의 앞 날을, 그리고 행복을 서로에게 빌어줬다.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길이었고 사람이었다.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마르셀과 아틸라의 목에도 걸려있는 이 트리니티가 우리를 언제나 지켜 줄 것이다.







한시간쯤 더 올라 엘 세브레이로(El cebreiro)에 도착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 주인공이 검을 찾은 곳이 바로 이 곳에 있는 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특이한 전설을 갖고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한명의 신자만이 그 날의 예배에 참석을 했었다고 한다. 

신부는 어쩐지 귀찮은 마음이 들어 그 날의 미사를 대충 끝내고 말았는데, 

미사가 끝날 때 성배에 있던 와인은 피로, 밀떡은 살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스페인의 어떤 왕이 그 기적의 성배를 성으로 옮기려 했으나, 

아무도 그 성배를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배는 여전히 이 성당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을이었고,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마르셀을 놓친 아틸라와 나는 둘이서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몇일 전에 만난 스페인 아주머니와 프랑스인 여성 순례자를 만났는데, 

그 둘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들을 그렇게 울게 만든걸까? 아틸라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설의 성배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가볍게 쿠키를 먹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성당의 바로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럽의 공동묘지들은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처럼 을씨년스럽거나 괴기스럽지 않았다. 그냥 공원같은 느낌이었다. 


이름도 알 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한 시대를 살았고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의 마음에 슬픔을 남긴채 이 곳에 누워 있을 것이다. 


죽으면 그저 돌비석 하나 남겨질 뿐인 인생,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걸까? 



"아틸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음..나는 죽음이 절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육체는 죽어 없어지지만 그 에너지는 여전히 살아왔던 그 공간에 남아 머무르고 있을거야. 

그리고 그 에너지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 이 세상을 우리와 함께 살아 갈 거니까. 죽어도 사라지는건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

없어지는 건 그저 이 몸뚱아리 뿐인거지."


"죽음은 또 다른 탄생이고 시작이니까. 존재하는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저 돌도, 저 나무도 말이야."




덩그러니 세워져있는 비석들만이 존재를 알려주고 있는 그 사람들이 내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삶을, 그리고 어디선가 그를 기억하고 있을 누군가를, 과거가 되어버린 그들의 존재 자체를 축복해주었다. 



죽음..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리. 











늘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수많은 트리니티들을 오늘부터 나는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몰려왔다. 습하고 축축한 갈리시아의 날씨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안개는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서늘한 공기는 나의 가려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었다. 아틸라와 나는 둘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길을 걸었다.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들이 솜사탕처럼 풀 사이에 걸려있다. 


한 웅큼 떼어내어 먹어보고 싶다. 




엘 세브레이로에서 부터 내려오는 내내 안개가 자욱했다. 경사가 가파른 편이었지만 날씨가 서늘해 걸을만했다. 

그리고 내리막의 중간에 나온 작은 슈퍼마켓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한다.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빵과 참치, 올리브, 치즈, 토마토를 샀다. 오늘은 투나 샌드위치다 ! 









폰페라다에서 사 놓은 핫소스는 정말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매운걸 좋아하는 아틸라와 내게는 필수 아이템 ! 우리는 매 끼니 때 마다 핫소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커다란 빵을 가로로 잘라 참치와 치즈, 토마토를 올리고 핫소스를 뿌리면 샌드위치 완성 ! 


먹고 싶은 만큼 잘라서 먹고 남으면 다시 싸서 들고 다니다가 먹고싶을때 먹으면 된다. 

그리고 이 곳의 올리브는 정말 너무 맛있었다. 한국에선 올리브를 전혀 먹지 않았었는데, 먹다보니 이 맛에 중독된 것 같다. 

김치와 피클같은 대안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이젠 정말 올리브를 좋아하게 되었다.




바람이 부는 야외 테이블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비가 조금 떨어지려는 듯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금방 멎었다. 

이 길 위에서 비를 많이 만나지 않은 것도 정말 행운이었다. 



밥을 먹고 다시 길을 걸었다. 팅팅 부어오른 팔의 가려움을 시원한 사람덕에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씨가 맑아지고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가려움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덥고 가렵고 길은 험했다. 


가려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빨리 걸었다. 가파른 길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아틸라보다 앞서갔다. 

어젯밤의 고통이 되살아난다. 뼛속부터 가려워 온다. 살갗은 뜨겁게 부어오르고 뼛속은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지난번에 물린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게 바로 그 악명높은 배드버그구나..



온 몸이 가려웠지만 나는 어느 한 곳을 손댈수조차 없었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입은 겉옷 안의 상태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빨리 어디론가 들어가서 옷을 벗고 버물리를 온몸에 바르고 싶었다. 버물리의 그 시원한(?) 느낌이 그나마 조금 도움이 되었다.

상태를 호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가려웠다. 너무 괴롭다. 


하지만 이깟 배드버그 때문에 울고싶지 않았다. 배드버그 때문에 울진 않을 것이다. 



엄청나게 가파른 비탈길을 쉼없이 올랐다. 그리고 그 비탈길 위에 있던 바로 들어가 옷을 벗고 온 몸에 버물리를 발랐다. 

온 몸이 빨갛다. 심각하게 팅팅 부어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약국이 있는 큰 마을까지 오늘 무조건 가야했다. 



밖으로 나갔다. 아틸라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그를 더 반기는 사람도 만났다. 



이그나시오 ! 



레온에서 헤어진 아틸라의 초기 일행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아틸라는 몹시 반가워했고, 이그나시오도 그랬다. 

그리고 아틸라는 배낭도 풀지 않은채 이그나시오와 대화에 열중이었다. 



"아틸라. 그냥 여기서 좀 쉬어가자 ~ 가방 내려놓고 얘기해. "

"아 그럴까 ? 고마워 ! "



그리고 그 둘은 그간 못다한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려움과 싸우고 있던 나는 바 안을 들락날락하며 버물리를 발라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한마디씩 묻는다. 




"걱정마세요 ! 완전 소독 다 하고 왔어요. ㅜㅜ" 




다들 이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에게 배드버그가 얼마나 치명적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동양인들에게 유독 심각하게 나타나는 이 증상들의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설명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이 조그만 나를 걱정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는 여전히 뜨거웠고,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그늘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앞서 걸었고, 아틸라는 이그나시오와 함께 뒤따라 왔다. 


한 시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빨리 트리아 카스텔라까지 가서 약국에서 약을 사고 싶을 뿐이었다.  

가려움을 참으려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빨리 걸었다. 조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소 똥인지 염소 똥인지, 아무튼 짐승의 분비물이 사방에 널려있는 작은 마을을 지났다. 

이 곳 갈리시아 지방의 사람들은 짐승의 분비물에 전혀 신경을 안쓰는 듯 했다. 온통 똥밭이야 !!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니고 짐승이 사는 마을인가보다. 

사람보다 짐승이 더 많이 사는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사람이 치우길 포기 한 것이리. 


그런곳에 멈춰서 쉬면 또 다른 배그버그에 물릴 것 같았다. 배드버그 노이로제에 걸린 것 같다. 



그 다음 마을도 그냥 지나쳤다. 아틸라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조금 쉬어가자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망이 탁 트인 풀숲을 찾아 자리를 폈다. 요가 인스트럭쳐인 이그나시오는 요가매트를 들고 다녔다. 

깔고 앉기는 정말 좋았다. 점심때 먹고 남은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내가 좋아하는 초콜렛 쿠키도 나눠먹었다. 


너무 가려워서 너무 괴롭다는 나를 아틸라가 진심으로 걱정해준다.. 오.. 불쌍한 치키티타. 라고 하며 말이다. 

이그나시오는 다음 마을에서 내가 약을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우루과이 또한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는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몰랐던 사실 ! 

스페인어는 정말 배워두면 두루두루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레온에서 사흘을 쉬고 혼자서 하루에 50km씩 걸어 왔다는 이그나시오가 그의 비법을 전수해줬다.

머릿속을 비울 수 있게 하는 비법 !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스틱을 땅에 퉁퉁 퉁겨가며 걷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나무 스틱이 땅에 떨어지면서 생기는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박자로 막대기를 놓으면서

그 울림에 집중을 하다보면 머릿속이 비어지고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막대기를 퉁퉁 거려가며 산길을 내려갔다. 정말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셋이서 엇박자로 쿵쿵, 한명이 박자 놓치면 또 다시 쿵쿵, 


음악이 따로 필요 없었다. 이 또한 훌륭한 음악이니 말이다.









드디어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이 곳에는 천년묵은 나무가 있었다. 

이그나시오가 나무에게 다가가 그를 느낀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버텨온 나무의 

기운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며 한참을 나무에게 붙어 있었다. 


나도 다가가 나무에게 살짝 손을 대 본다. 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에게 지팡이를 팔려 하는 할아버지를 지나치고서 마을로 들어섰다. 

첫번째에 나온 알베르게에는 자리가 없었다. 두번째 알베르게로 갔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곳에는 3개의 침대가 남아있었다. 사실 누군가가 예약을 해 놓은 자리였는데 갑자기 취소가 되어 우리에게 남겨진 침대였다. 


대신 자리는 제각각이었다. 이그나시오는 다른방을 쓰게 되었고, 아틸라와 나는 같은방이었지만 떨어진 침대를 썼다. 


그렇게 침대 아랫층을 쓰게 된 나에게, 같은 방에 있던 모든 순례자들이 행운아라고 이야기해줬다. 

물론 나의 배드버그에 대한 염려도 쏟아졌다. 모두 소독 되었으니 걱정마라고 그네들을 안심시켜준다. 




짐만 푼 우리는 나의 약을 사기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기 직전인 약국으로 들어가 가려움에 좋은 약과 

칼슘을 샀다. 고마운 이그나시오. 오늘 그를 만난 것 또한 그냥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다. 


칼슘은 피에 어떤 작용을 해서 벌레들이 잘 안물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미 물릴대로 물려버린 내게는 별 효과가 없을테지만 그래도 더 이상의 물림은 없게 하기 위해 샀다. 


슈퍼마켓에도 들러 내일 먹을 식량들을 준비했다. 

둘이서 나눠먹을 음식을 산다.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젠 그가 없는 카미노를 상상하기 힘들다. 결국 나는 혼자이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혼자인 것을 이젠 바라지도 않는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닌 함께 걷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돌아가자마자 아틸라가 물통에 물을 담아 건넨다. 그리고 그의 비타민 하나와 방금 산 칼슘 하나를 넣어 나에게 준다. 



" 하루에 두번씩 꼭 먹어. 내 비타민도 먹어. "



그의 걱정과 관심이 고맙고 기분좋다. 

칼슘과 비타민이 통 속에서 기분좋게 녹아들어가고 있다. 환타맛이난다. 


샤워를 하고 약국에서 사온 맨소래담같이 생긴 약을 온 몸에 발랐다. 바디로션같은 느낌이다. 




씻고 밖으로 나왔더니 아틸라와 이그나시오가 없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구입한 배그버그 스프레이를 침대에 뿌렸다. 

아틸라의 침대에도 뿌리고 이그나시오의 침대에도 뿌렸다. 이젠 좀 안심이 된다. 


아틸라가 돌아왔다. 그리고 히데오 상이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다고 말을 했다. 

저녁시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알베르게로 넘어오라고 했고, 그는 이제 씻겠노라 말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히데오상이 밥을 해서 주려나?' 



늘 밥을 선호하는 히데오상이었기에 나는 간만에 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슈퍼마켓에서 무려 6유로나 주고 와인을 한 병 샀다. 

지금까지 슈퍼마켓에서 사 먹은 와인 중에 가장 비싼 녀석이었다. 




씻고나온 아틸라와 이그나시오와 함께 와인을 들고 히데오상을 찾아 나섰다. 

마을에는 서너개의 알베르게가 있었고 반가운 얼굴들을 곳곳에서 만났지만 히데오상을 만날 순 없었다. 

사람들에게 히데오상을 못봤냐고 물어도 다들 보긴 했는데 어딨는지 모르겠다 말한다. 


결국 우리는 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는 폴과 콜린이 있었고 히데오상도 있었다! 



"히데오상! 여기서 뭐해요?!"



혼자 밥을 먹으려 하던 히데오상은 우리를 보고서는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를 찾으려 했는데 찾지 못해서 결국 혼자 밥을 먹으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는 함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자고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와인이 민망해졌다. 

테이블 아래로 슬쩍 와인을 숨긴다. 요 녀석은 어쩔수 없이 나중에 먹어야하겠다.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아틸라와 이그나시오는 이 마을 특산물이라고 하는 소의 혀 요리를 선택했다.

나는 그냥 돼지고기를 시켰다. 소의 혀 라니... 정말 먹고싶지 않다.

생긴것도 혀 같았다. 윽... 나에게 맛보라며 권했지만 먹고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히데오상이 자신의 카미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만약 산티아고에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아주 근사한 저녁을 사겠노라 얘기한다. 산티아고에서 지금껏 만난 친구들을 모두 모아놓고 

저녁을 대접 할 예정인데 그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도착할 예정인 날짜를 알려주면서

그 날짜의 저녁 7시에 산티아고 광장에서 만나자는, 아주 기약없이 느껴지는 약속을 했다. 


"와우! 정말 고맙습니다. "



과연 만날 수 있을까 ? 아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러했으니 말이다. 




갑자기 아틸라의 전화기가 울린다. 지금껏 울렸던 적이 없었는데, 무슨일이 생겼나보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고 들어온 아틸라의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일있어?"


"아... 친구가 사고로 죽었대."


...




그는 정말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어떤말로도 위로를 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저 쏘리 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불현듯 오늘 낮에 우리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도 니가 그를 기억하니까, 그는 언제나 함께 있을거야. 새로운 시작이잖아." 


"응 그렇지. 괜찮아. 어쩔수 없는 거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그의 큰 어깨를 살짝 다독여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작은 위로가 되길 빌었다.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갈리시아의 밤은 쌀쌀한 것이 아니라 추웠다. 

추위는 내 가려움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다행스러웠다. 



아틸라는 말이 없다.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리라. 




숙소로 돌아와 양치질을 하고 나왔더니 아틸라가 없다. 아마 담배를 피고 있는 듯 하다. 

오늘 낮에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 또한 그냥 있었던 일이 아닌 것 같다. 이 모든 상황이 과연 우연일까? 


침낭속에 들어가 누워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뒤, 아틸라가 들어왔다. 



그의 자리로 가서 잘 준비를 한다. 내가 누웠을때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그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Good night, thanks for today



 우리 둘 만의 굿나잇인사, 그리고 나는 그에게 볼인사를 해 주고 살짝 안아주었다.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Thanks for today. Good night ."



그가 내 이마에 살짝 뽀뽀를 해 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누워서 그를 바라봤다. 

깜깜한 밤이라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아틸라가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게 해주세요.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