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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라이프/glowing day

산성탐방




2011.06.08


내가 부산에 내려온 첫 날부터, 엄마는 산성에 오리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집 뒷편에 금정산 등산로가 있어 매일 아침마다 등산을 하곤 하는데, 그 길을 따라 쭉 가면 산성이 나온다고,
거기 오리고기와 흑염소 국수 막걸리 등등이 맛있다며 입맛을 다시는걸 보니 꽤 오래 기다리셨나부다 =_=

그리하여 오늘 금정산성 탐방을 떠나게 되었다.


낮 12시,
남들은 보통 산엘 가지 않는 늦은 시각. 우리는 아침부터 늑장을 부려 그제서야 집을 나서게 되었다.

평일 낮의 산은 고요하고 또 적막했다.
 간혹가다 사람이 보였는데, 그럴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저 사람도 백순가부다 ."

라고 말해 주셨다..-_- 네.. 저도 백수입니다 ㅎㅎㅎㅎ


나는 나름 등산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르는 길이 꽤 가팔라서 힘들었다.
날씨는 초여름 날씨라 땀도 뻘뻘 나고, 어쩐지 머리가 어질어질 한게 내가 걷는 이 길이 이세상의 것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꿈틀꿈틀 애벌레 한마리가 나와 함께 등산을 하고 있었다.

마른 땅을 헤짚고 기어가는게 왠지 안쓰럽다.

무슨 벌레의 유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꽤 컸고 색깔도 꽤 특이했다. ㅎ 귀엽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이 있다.
애벌레가 주인공인 어른을 위한 동화.

그 애벌레들은 끝도 모른채 그냥 자기들끼리 기둥을 만들어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게 된다.

정상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래로 떨어져 죽는 것 뿐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미련한 애벌레들은 남들이 하는 대로 위로만 위로만 올라갈 뿐이다.

그 와중에 흰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가 눈이 맞아
사랑을 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결국 나비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아주 감동적인 내용의 이야기 인데, 이 애벌레를 보면서 왠지 그 책이 생각이 났다.

요 녀석도 언젠가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겠지,
부디 이 치열한 생태계에서 무사히 살아 남아 새로운 인생을 누리게 되길 빌어줘야겠다.


산 바람이 시원하다.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밟았는데, 바스락 하는 소리 온 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산의 고요와 적막을 깬 것 같아 왠지 머쓱해졌다.


한시간 여를 올라, 정상에 다다랐다. 꽤 힘들다.
오리고기를 위해 초콜렛 하나 안챙겨 온게 너무 후회스러웠다. 아 당떨어진다 =_= ;;

우리가 오른 정상은 산의 정상이 아니고, 그냥 정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능선 꼭대기 였다.
우리가 찍고 내려가면, 거기가 정상이 되는거지 뭐 ,


이제는 엄마와 한마음이 되어 산성마을을 찾아 헤맸다,ㅎ 도대체 어디로 가야 오리고기를 파는 집이 있는걸까 ? ㅎ
엄마는 지도를 보고 나는 아이폰에서 지도를 켜서 검색을 했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왠지 우습다 ,  오리고기집을 찾아 등산을 한 모녀, 누가 보면 비웃을 것 같아 길가는 사람한테 묻지도 못했다....








동문을 지나고, 연못을 지나 마침내 무엇인가 팔 것 같은 느낌의 건물들을 발견 했다 !


아침을 고구마와 녹즙으로 간단히 때우고 집을 나선 우리는 꽤 배가 고팠고,
오리집이 보이자 마자 바로 들어가버렸다.
십분만 더 걸으라 그랬으면, 우리 모녀는 그냥 주저앉아 버렸을 것 같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산 중턱에 염소와 오리를 파는 집이 있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왠지 시골집으로 시집와서 고생하는 며느리(?)쯤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짠 했다.
엄마한테 얘길하니, 일하는 아줌마 라고.. 이런데서 일하면 돈 더 많이 준다고 하신다 .
역시 세상은 알고 봐야한다. ㅎㅎ




음식점의 평상에 누워 지붕에 걸려있는 등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새는 지저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분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엄마는 내가 이런 재미에 맛들려 사회부적응자가 될까봐 몹시 걱정을 하셨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21세기 한국 젊은이니까,

이렇게 자연속에 들어와서 휴식을 취하는게 정말 너무 오랫만인것 같았다. 뭘 하느라 대체 그렇게 바쁘게 산 걸까 ?

주말이면 산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여유따위는
왜 미처 못했던 걸까 ?

갑자기 지난 3년간의 시간이 조금 허무해졌다.







다음 번에 다시 회사생활을 할 때에는, 꼭 주말이면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을 해본다.

왠지 신선놀음 하는 걸 공유하고 싶어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다.
내가 백수가 된 걸 모르는 친구가 바로 전화가 왔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엄마가 눈치를 준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런걸 왜 대체 동네방네 떠벌리냐신다.... 백수인 딸이 챙피하신가보다...
요즘 세대는 원래 그렇다고, 시시콜콜 모든걸 다 공유하고 떠벌리고 산다고 해도 안믿으신다.
니가 원래 오지랖이 넓다며, 이런건 제발 소문내지 마라며 면박을 준다.... ........... chet.... 난 괜찮은데 =_= ;
이렇게 블로그에 까지 써놓은걸 보면 까무러치실지도 모르겠다 ㅎㅎㅎㅎㅎㅎㅎ






예전 회사 부대표님이 좋아하시던 금정산성막걸리, ㅎ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까지 가서 직접 사 오셨다고 했다.

정말로 이 술은 금정산성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제조일은 어제, ㅎ 신선한 우리쌀 곡주의 맛이 달짝지근하다.

나는 이 술을 서울에서 처음 먹어보고,
두번째로 산성엘 와서 먹고 있다.

예전 생각이 나서 기분이 묘해졌다.


명이나물과 이 막걸리를 먹으면서 좋다고 웃고 떠들던 시간이 있었다. 미친듯이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던 때도 있었다. ㅎ

소월마을, 이름도 이쁜 그곳 ㅎ

꽤 오래 기억 될 추억 중 하나.




둘이서 그렇게 자연을 벗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오리 한마리와 막걸리 두통을 해치워 버렸다. 

먹는 내내 우리 평상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울어대던 들고양이 6마리에게 고기 한점씩을 나눠 주고,
우리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깜깜하다....................................

100m쯤 걸었을까 ? 둘다 다리에 힘도 없고 배도 불러 못움직이겠다며....
근처에 있는 평상에 주저 앉아버렸다. 막걸리를 한통만 먹을걸 그랬나부다.  ㅎㅎ




그렇게 산 속에 있는 평상에 누워 또 쉬고있다.

마냥 좋았다.
그냥 행복했다.

기분도 알딸딸하고 배도 부르고, ㅎ
이렇게 좋을수가 ! ㅎ





내 인생에서 이런 날이 또 언제 올까 싶었다.
백수로의 생활, 이런 한가함, 여유로움... 즐길 수 있을때 실컷 즐겨 두는게 내 인생에 대한 예의겠지 ?
물론 부모님 생각은 다르신 것 같지만........

사실 나도 내 개인적으로 딱 이번주 까지만 휴가로 잡고 쉬고 다음주 부터는 계획적으로 살리라 마음을 먹고있다.

이런 시간을 오늘 보낼 수 있었던건 정말 행운이었고, 행복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길었다.. 길도 헤매고 다리에 힘도 없고 ㅎㅎㅎ
다음번에는 막걸리를 한통만 먹자고 둘이서 계속 얘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6시, 6시간만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스토리도 엄청 긴데, 쓰다보니 또 너무 길어진 것 같아 줄여야겠다. 



집에 와서 씻고, 컴퓨터를 하다보니, 왠지 알딸딸한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듯 하다. =_=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오리고기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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