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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5, 더치페이




2011년 8월 26일. 

Pamplona  >  Purnte la Reina    |   25Km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 알베르게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 내 윗 침대의 뒤척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죽인 웃음소리들 때문에 잠을 꽤나 설쳤다. 
 
부지런한 다른 순례자들은 또 대여섯시부터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최대한 게으름을 부리며 내 얇은 침낭 속에서 꾸물대고 있다.
여덟시에는 무조건 알베르게를 떠나줘야 하기때문에 꾸물거림도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

한바퀴 구르면 바닥으로 떨어질 좁디 좁은 이층 침대 아래에 누워서 스트레칭을 한다. 
혼자 스트레칭 하기에는 괜찮은 사이즈다. 물론 스트레칭의 종류에는 제약이 있지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으러 주방으로 올라갔다. 
부지런한 일본인 켄따루와 후미야가 벌써 아침을 먹고있다. 

어제 사 놓은 빵을 가지고 와서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다. 50센트짜리 따뜻한 자판기 커피와 바게뜨, 이거면 충분하다. 


후미야가 오늘 함께 걸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먼저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나는 준비하려면 시간 더 걸릴텐데 괜찮겠느냐고 돌려 말해본다. 

괜찮다고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들이 갑작스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난감하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켄따루, 후미야와 함께 어스름한 길을 나섰다.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부는게 영락없이 비가 올 날씨다. 


처음으로 만난 대도시인 팜플로나에는 대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학교들에서 도장을 받으면 새로운 졸업장을 하나 더 받을 수 있다는 책의 정보를 읽고 대학교 안으로 찾아 들어갔다. 

대학 캠퍼스는 언제나 설레임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젊음과 열정이 캠퍼스 내에 녹아 있어 그런게 아닐까 ?



 


팜플로나 대학에서 도장을 받아 나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처음는 금방 그칠 것 처럼 한방울씩 떨어지더니 빗발이 꽤나 굵어진다. 

한번 입고 고이 접어놓은 우비를 꺼내 입고 길을 걸었다. 
빗발은 점점 세지고, 여기저기서 비를 피하고 있는 순례자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배도 허전하고, 비도 많이와 길 옆에 있는 바에 들어가서 커피한잔 하며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저 튼튼한 일본인 청년 두명은 쉴새없이 걷기만 한다. 

아.. 그냥 혼자걸을껄.. 이라고 또다시 후회를 한다. 
자꾸만 뒤쳐지는 내가 신경쓰이는지, 앞서가던 두 명이 자꾸 멈춰서서 날 기다린다. 
안기다리고 그냥 가도 된다고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가까이 오면 또 가고, 가까이 오면 또 가서 그럴 수 없었다. 

조금 난감하다. 


발이 아파 자꾸 뒤쳐지는 내가 신경쓰였는지 그들이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나와 함께 걷기 시작한다. 나를 친구로 받아주기로 마음 먹었나보다, ㅎ 

우리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교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일본 소설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유명한지에 대해서 말을 해 주고, 나 역시 일본 소설 좋아한다고 이야기 해 줬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소설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는 그리도 유명한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등을 몰랐다. 

공감대 형성이 안되다. 주제를 노래로 바꿔본다.  

정말 일본에서 한국 아이돌이 인기가 많냐고 물었더니, 카라, 보아, 2NE1 등의 이름을 들먹인다. 
그네들은 정말로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2NE1의 I don't care 를 부르며 길을 걸었다. 



아스팔트 길을 한참 걷다가 들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산과 같은 커다란 언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 옆으로는 끝없는 해바라기 밭이 이어져있는데,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삐쩍 마르고 고개를 푹 숙인채 새카맣게 말라 죽어있다.
단체로 무슨 병같은게 걸린 모양이다.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든다. 








길을 걷다보면 길 위에 놓여진 십자가, 사진, 꽃 같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바로 이 길 위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한다. 

낯선 타지에서, 나를 찾기위해 그렇게 애쓰다가 허무하게 끝이 나 버린 인생들. 마음이 참 아프다. 
그리고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이 이 길위에 남아 있을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이 길을 그리도 특별하다고 하나보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이 길을 밟았을테니까, 
고통과 눈물, 기쁨과 희열을 함께 안고 이 길을 걸었을테니까.
이 길 위에서, 이 땅 위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와 믿을 수 없는 일들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산이 가팔라지기 시작할 때 쯤 비가 그쳤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꽤나 맑아졌다. 

 

Alto de perdon  용서의 언덕. 





산의 정상은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은 이 언덕에서 지나쳐온 팜플로나, 론세스 바이어스, 피레네 산맥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운이 좋았던 나는 팜플로나는 볼 수 있었지만, 론세스 바이어스나 피레네 산맥까지 볼 생각은 미처 못했다. 아쉽다.

용서의 언덕은 바람이 엄청 분다. 
저 철로 만들어진 순례자 무리들도 바람에 맞서 힘겹게 걸음을 걷고 있다. 

비온 직후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언덕 위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언덕을 오르다 만난 락 오빠와 함께, 그래도 한국말을 다시 하게 됨을 감사하며 그렇게 고픈 배를 살짝 채웠다. 

두번째로 산티아고를 걷고 있던 락 오빠가 우리가 오늘 가야 할 곳을 알려줬다. 
저 멀리 조그맣게 마을이 보인다. 아직 멀다....



내려가는 길은 꽤나 가팔랐다. 

발이 아픈 나에게 켄따루는 자신의 크록스를 빌려줬고, 락 오빠는 잘못 매고 있던 내 배낭의 사용법을 다시 알려줬다. 
어깨로 가방을 메고 다녀서 어깨가 너무 아팠는데, 허리쪽 벨트의 바싹 조이니 허리와 어깨로 힘이 분산되어 훨씬 편안해졌다. 이걸 모르고 지금껏 어깨가 아파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역시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하는구나 싶다.







사막같은 밀밭이 펼쳐져있다. 

밀밭은 5,6월에 수확을 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이렇게 수확된 이후의 황토색 밀밭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끝없이 넒게 트인 밀밭이 내 마음도 확 틔워주는 듯 하다. 상쾌하다.

비가 내렸다가 그치니 새로운 소리가 땅에서 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땅이 마르는 소리 일까, ? 알수없는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오늘 내린 비를 이 메마른 땅은 무척이나 환영하나 보다.


길을 걷다보니 포도밭이 나왔다. 처음으로 만난 포도밭이다.
스페인은 와인이 유명하다.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가 유명한 것은 당연하다.
길 가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한 알 따 먹었다. 아직 덜익었는지 살짝 시큼하고 떫다.
자연에서 얻은 당분이 내게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 길가다 포도를 따 먹는 상상도 못했던 경험에 기분이 짜릿해져 온다. 



 


언덕 이후에는 끝없는 평지가 이어졌다. 락 오빠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락 오빠는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도마복음 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성경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오쇼 라즈니쉬와 같은 사람들, 명상 등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걸 알고 있는 나도 신기했지만, 락 오빠는 나보다 훨씬 더 신기했다. 정체가 뭔지 궁금하다.


중간 마을에 있는 한 레스토랑 겸 알베르게에서 불친절한 종업원에게 도장을 받고, 아쿠아러스를 하나 샀다.
더워진 날씨에 무엇인가 시원한 걸 먹고 싶었고 콜라는 먹기 싫어서 선택한 아쿠아러스. 파워에이드 같은 맛이다.



두어개의 마을을 더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떼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푸엔떼 라 레이나는 작은 마을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여러개의 알베르게가 줄줄이 있었지만, 락 오빠는 우리를 시립 알베르게로 안내해줬다. 함께 도착한 우리는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먼저 도착한 까뜨린이 우리를 반겨줬다. 발에 물집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러운 그녀는, 쉬지 않고 걷기 때문에 늘 빨리 도착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쉬지 않은 게 아니고 쉴 수 없었던 것이다.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레로가 스탬프를 찍어주면서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한국 그룹인 10cm의 노래가 그의 컴퓨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뭔가 핸섬한 스페니쉬 호스피탈레로는 한국인인 나에게 몹시 친절했다.
알고보니 예전에 만난 여자친구가 한국인이었고, 그녀와 함께 한국에서 몇달 머물렀다고 한다. :)

한국인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한국인임이 몹시 자랑스럽다.
내가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도 나로 인해 한국인을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씻고 빨래를 돌리고 나니 배가 출출해져 온다. 
5시 정도 되었었기에, 저녁을 먹기 전에 간단한 따빠스를 조금 먹고 오기로 결정했다. 
나, 까뜨린, 락오빠, 그리고 켄따루와 후미야. 다섯이서 함께 마을 근처에 있는 따빠스 가게로 출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서 생겼다.

6개에 10유로 하는 따빠스 2접시와, 각자 음료를 하나씩 시킨 다음 1/n 을 하려했던 우리에게 일본인 청년 두명이 자기네는 따빠스를 먹지 않을테니 셋이서 먹을 만큼만 시키라고 한다. 우리는 당황했다.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배는 고픈데 돈이 없기 때문에 따빠스를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락오빠만 쳐다봤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내가 계산하겠다고 하기도 곤란한 상황, 특히 한국인들은 이런 상황에 몹시 민감하다. 

독일인 까뜨린은 일단 배고프니 주문을 하자고 한다.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결국 우리는 따빠스 6개가 나오는 1접시를 시키고 음료를 하나씩 사서 먹었다. 
따빠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들이 안쓰러워 먹으라고 권했더니 고맙다고 하며 낼름 먹는다. 


사실 직장인이었던 나나 까뜨린, 그리고 정체를 알수 없지만 락 오빠도 배고픈걸 참아가며 돈을 아끼자는 주의는 아니다. 돈이 넉넉한건 아니지만 그정도는 쓸 수 있을 만큼의 잔고를 준비하고 왔으니까. 
하지만 그들로 인해 우리도 먹고 싶은걸 먹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된 상황이 일어나니, 뭔가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더치페이를 하는 서양의 문화, 이건 굳이 서양의 문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섯명이 함께 왔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자기는 돈이 없으니 먹지 않겠다라고 하면... 
아... 정말 뭐 어쩌란 소린지.. 

그 일로 나와 까뜨린과 락오빠는 우리 대로, 그리고 켄따루와 후미야는 그들대로 마음이 상해버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우리는 마트를 갔다. 
그리고 오늘도 락 오빠가 저녁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야호 ! 
오늘 저녁 먹을 쌀, 고기, 야채를 사고 내일 먹을 빵과 비스킷도 준비했다. 언제나 슈퍼마켓 가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오는 길, 락 오빠가 모든 짐을 다 들고 있었다. 

까뜨린이 도와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는 한국남자들은 원래 다 저렇게 한다고 말해줬다. 
정말 그렇냐고 깜짝 놀라는 까뜨린에게, 한국에서는 여자가 무조건 옳기 때문에 남자는 무조건 여자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웃자고 한 소린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나도 좀 당황했다. 그리고 그 뒤로 그녀는 늘 내가 옳다며....
한국에서 온 여자인 지니는 언제나 옳다고 말하고 다녀서 모두를 웃게 만들곤 했다.


함께 저녁을 먹을 사람이 꽤나 많다보니 정말 거대한 저녁 식사가 만들어졌다. 
까뜨린, 켄따루, 후미야, 나, 락오빠에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한 히데오상,
그리고 락 오빠의 특별 초청으로 함께하게 된 케샤까지. 






우리의 저녁은 정말 거대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으며, 건배를 요청했다. 
우리는 정말 많이 먹었고, 정말 많은 얘기를 했고, 정말 많이 즐거웠다. 

팜플로나에서 살짝 인사를 하고 오늘 처음으로 얘기를 해 본 폴란드인 케샤는 정말 특이한 여자아이였다. 
저 날 우리는 별자리, 사주, 운명 등에 대해 함께 얘기했고 우리의 이야기는 소등시간인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끝이났다. 

파란눈의 여자아이가 별자리, 운명을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정말 흥미롭고 신기했다. 

이런 일련의 문화들은 동양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낮에 있었던 따파스 사건 때문인지 내내 조용히 있던 켄따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에 얼마 쓸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왔어?"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을 받았다. 낮에 있었던 그 일이 그네들에게도 적잖은 충격과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실 하루에 얼마써야 한다는 예산은 세우고 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이 곳에서 쓰기엔 충분할 만큼의 잔고는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나와 비교하지는 말라고, 너는 학생으로 힘들게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떠나온 것 아니냐고,
나는 4년이 넘는 시간을 직장인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너보다 돈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우리는 학생인 너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번 돈을 가지고 이 곳에 온 것에 굉장히 놀라고 있으며 
넉넉치 못한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노라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언제나 당당하라고 얘기해준다. 

의기소침해져있는 그네들의 모습이 참 안쓰러웠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얘기해주고 화이팅이라고 해줬다.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 또한 그 전의 상황에서 불편함을 느끼긴 했지만,
돈 때문에 앞으로 남은 그의 길고 긴 인생이 힘들어지진 않길, 

그리고 그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길 빌어본다. 



새로운 사람을 많이 알게 되서일까 ?

이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 한국 생각이 거의 나지 않는다. 

늘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고 걸으면서도 무엇을 해야하나 참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쩐지 한국이 점점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저 멀리 두고 온 한국이 아닌 여기를, 지금을,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 어슴푸레 느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