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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8. 과유불급





2011년 8월 29일.    


Los Acros  >  Logrono  |   29.5Km   



어쩐지 잠을 설쳤다. 위에 루이스가 자고 있다는게 자꾸만 의식되어 움직이는게 너무 신경쓰였던 것 같다. 
그런걸 의식하면 할 수록 괜히 더 움직이고 싶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불편한 법. 
그래도 전날 마신 와인 덕에 초반에는 아주 잘 잘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밤마다 이 분주한 곳에서 꽤나 잠을 잘 자는 것에는 와인도 한 몫을 하는 듯 하다. 
매일밤 약간 알딸딸할 정도로 와인을 마시고 바로 잠자리에 드니 잠이 잘 올수 밖에. 
이래서 와인은 순례자의 친구라고 하나 보다. 


보통 아침일찍 나서는 젊은 친구들이 다들 마당에서 무엇인가를 먹거나, 짐을 정리하거나 하고 있었다. 
나를 본 케샤가 나에게 반갑게 다가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며 함께 걸어줄 수 있냐고 비밀스레 묻는다. 

그러겟노라 말하고 씻고 케샤와 함께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늘 케샤와 함께 걷던 켄따루와 후미야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출발했다고 한다. 

루이스와 스페인에서 온 매력적인 아이세야가 앞서 걷고, 산드라가 그들 뒤를 따라 걸었다.
아이세야는 지난번 팜플로나 가는 길에 루이스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리따운 순례자였다.
그녀는 오늘까지만 걷고 내일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루이스와 함께 걷기로 했다고 한다.  

20살인 그녀는 루이스와 함께 걷다가 에스텔라를 앞두고 걷는것을 잠깐 포기했었다. 
그리고 어제,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우리가 있는 그 곳으로 온 것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날 함께 걷던 루이스와 아이세야는 반대로 오는 한 순례자를 만났고,
그와 함께 커피를 마셨는데 그 뒤로 아이세야는 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순례자에게 모든 에너지를 뺏겨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순례자는 바로 내가 잠깐 스쳐지나가고 얼굴을 기억하는, 히피같이 보이는 그 남자 였다.
루이스는 나에게 이 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의 에너지를 뺏기지 않게 늘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어쩐지 너무 강하고 무섭게 느껴지던 그 남자의 눈빛이 다시 떠오른다. 



케샤는 꽤나 진지했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어젯 밤 케샤가 자려고 누웠는데 후미야가 케샤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케샤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녀의 입술을 훔쳤고, 너무 당황한 케샤는 나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는 중이었다. 자기는 일본의 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가 없다며, 어떻게 묻지도 않고 키스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 무어라 답을 해 주어야 할 것인가. 

때로 아시아, 잘은 모르겠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남자가 그렇게 강하게 들이대는 것이 꽤나 보편적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후미야의 그런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니가 마음이 없다면 확실하게 거절하는것이 좋겠다고 말해줬다. 

케샤도 후미야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이 길이 끝나면 끝일 짧은 인연과 너무 먼 거리, 그리고 문화차이, 게다가 케샤가 후미야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컸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것을 극복할 자신이 없노라 했다. 
그리고 이미 케샤는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한 순례자를 만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다고, 후미야도 그런것을 이해하지 못하진 않을 것이며 너의 의견을 존중해줄거라고. 
단호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거절을 하는게 어떻겠느냐 얘기하고, 우리는 연애에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해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난 연애사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20살인 케샤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길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의 길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것은 배제하고 이 길을 나선 나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다. 그녀가 아직 어려서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10대 소녀처럼 한참을 둘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개를 한마리 만났다. 
길 위에 버려진듯해 보이는 개는 배가 고픈지 우리를 졸졸 따라왔다. 

묘한 느낌의 강아지, 어쩐지 슬퍼보이는 개 였다.






새로운 동지가 생겼노라며 케샤는 계속 그 개와 함께 걷고 싶어했다. 

개에게 먹을것을 주려는 케샤를 루이스가 말린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저 떠돌이 개를 부르지 말고 우리 갈 길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걸까? 개는 그 이상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는 우리를 한참동안 길 위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마을에 있는 바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산드라는 얼음을 얻어 아픈 골반에 대고 있었고, 우리는 바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팝송음악을 듣고 따라 불렀다.
음악 전공이라 그런지 케샤는 거의 모든 팝송을 다 알고 있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노라면 내 기분도 행복해졌다.



 


바의 주인이 도장을 찍어 달라는 우리의 손에 저렇게 도장을 찍어 줬다. 
너무 좋고 재밌다며 즐거워 하는 케샤 덕분에 나도 10대 소녀처럼 깔깔대며 웃을 수 있었다.
긍정의 에너지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지는 것이 분명하다. 


루이스와 아이세야는 밖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안토넬로와 독일인 여자아이(이름이 기억이 안난다)도 커피를 마시고 있다. 늦게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은 늘 비슷 비슷했다.  
모두 늑장을 부리기 때문에 늘 만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걷는 것이 좋고, 아마 그들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게으른 순례자들은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케샤와 걷는 것은 즐거웠지만 몹시 고단했다. 
그녀의 걸음은 빨랐고, 쉬지 않고 질문했으며, 모든 것에 감탄했다. 


길에서 라벤더를 발견하면 꺾어서 모자에 꽂아야 했고, 양을 만나면 양 소리를 내면서 인사를 해야했다. 

(양 자리인 그녀는 모든 양을 그녀의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보면 춤을 춰야 했고, 특이한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보면 함께 사진을 찍어야 했다. 
게다가 그녀의 끊임없는 질문에 늘 영어로 대답해야 했기에 내 머리속도 점점 힘들어 지고 있었다. 

걷기만으로도 버거웠던 나는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로고로뇨까지 가지도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too much.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 지나쳤다.. 그래 지나쳤다.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고 지나치게 질문하고 지나치게 감탄했다. 

세상 모든것에 관심이 있고 에너지와 기적을 믿으며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아직은 너무 어린 스무살이었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의 나는, 그 모든 것을 함께 해 주기가 슬프게도 너무 버거웠다. 


루이스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지만, 어쩐지 아이세야와 계속 함께하는 그에게 말을 걸기가 불편했다. 
우습다. 어쩌면 질투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나에게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괜히 심통이 난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늘없는 언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늘이 없어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걷기만 해야했던 우리에게 오르막길 끝의 벤치와 나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굴리, 안토넬로, 알렉산더가 이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에 주저앉아 약간의 스낵을 먹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있던 아몬드 나무에서 따온 아몬드를 돌로 깨 먹었다. 

아몬드 나무도 나에겐 처음이었다. 생긴것도 정말 신기했고, 돌로 깨서 먹는 그 맛도 너무 신기했다. 










약간 떫떠름한 듯한 생 아몬드의 맛, 그리고 그 특유의 향.
생 아몬드는 살짝 물기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눅눅하진 않다. 자연이 주는 고마운 선물. 
아몬드를 한가득 주워 온 루이스 덕분에 우리는 아몬드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안토넬로와 굴리, 루이스는 서로에게 엄청난 애정표현을 해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게이로 오해할 법한 행동들. 
굴리는 여전히 나에게도 천사라고 하며 뽀뽀세례를 해 댔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행동을 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간에 말이다. 안토넬로와 루이스는 굴리를 놓고 가위바위보로 승자를 겨뤘다. 그리고 굴리는 루이스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아몬드를 먹고 있는데 세 명의 순례자가 다가왔다. 호세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명이 케샤가 아침내내 말했던 길에서 만난 자신의 운명 같다는 남자 사우로 였다. 

호세와 존은 먼저 길을 떠나고 사우로는 우리곁에 남았다. 케샤가 몹시 즐거워 했다.  
그리고 나도 즐거웠다. 이제서야 나의 두뇌는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8살인 스페니쉬 사우로는 연극 배우이다. 그는 몹시 매혹적인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케샤에게 양보했다. 글쎄, 양보했다고 하기엔 혼자 있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케샤는 호세와 떠나고, 안토넬로와 알렉산더는 아이세야와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루이스, 산드라와 함께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루이스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아침의 과도한 대화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못할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목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들어가는 걸 수십번 반복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카메라 촬영감독이었고, 포토그래퍼 였으며, 7년 전인 35살에 모든것을 정리하고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것, 그래서 대충 42살이구나 하고 짐작할 뿐.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7년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아무튼 각자가 모두 지친듯한 우리는 조용히 그저 걸었다.
아직도 한참 남은 목적지만을 계산하며, 그렇게 그저 걸을 뿐이었다.



로고로뇨 가기 직전에 있는 마을에 겨우 도달했다.

우리보다 앞서 간 아이세야와 알렉산더, 안토넬로, 굴리는 샘물 근처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얇은 면 원피스 하나만을 입고 걷고 있던 아이세야는 온통 물로 젖어 움직이는 주류 달력 화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속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듯 모든것이 다 비치는 그녀는, 자신도 민망했는지 수건을 꺼내 몸을 감싼다. 

문화차이, 또 한번 느낀다. ... 아니, 문화차이일까 ? 사람차이일까 ? 모르겠다.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 위해 근처에 있는 바로 갔다. 놀이터에 앉아있던 케샤와 사우로가 따라 나선다.

루이스가 나를 위해 맥주를 한번 사고, 두번째 맥주는 내가 샀다. 레몬맛이 나는 맛있는 맥주였다.



루이스가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케샤는 자기가 치료해주겟노라 말한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그의 어깨에 대고 뭔가 진지해진 얼굴로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씨에스타를 즐기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낯선 광경에 주목하고 있다. 웃기다. 
케샤는 정말 특이하다. 저렇게 기 치료를 하는 것 보다 뭉친 어깨를 손으로 주물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저 조용히 맥주나 홀짝거리고 앉아 있었다. 


뜨거운 스페인의 두시, 나와 산드라 그리고 루이스는 씨에스타를 선택했고, 
젊은 우리의 친구들은 걷는 것을 선택했다. 


드디어 평온의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마을 주변에 있는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다. 
초록색 잔디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각자 스트레칭도 하고 맛사지도 하고 잠도 자고, 그렇게 우리는 맥주까지 마신 뜨거운 오후를 시원하게 보내고 있었다. 

어깨 통증을 계속 호소하는 루이스에게 살짝 마사지를 선사했다. 대충 내 마음대로 하는 건데 몹시 시원하다고 너무 고맙다고 한다. 골반 때문에 계속 괴로워하는 산드라에게도 살짝 마사지를 해 줬다. 

꼬레아나 스페셜 마사지라며, 너무 시원하다고 좋아한다. 








한시간여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로고로뇨까지 10km가 남아 있었는데, 중간에 마을은 없었다. 
길고 고단한 걸음이 될 것이었다. 

중간에 버스를 타고 가려고 하는 한 순례자를 만났다. 버스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우리는 걷기로 결심한다. 


루이스와 산드라는 앞서가고 나는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걷는 것이 편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언어가 나에게는 편하게만 느껴진다. 

앞서가던 루이스와 산드라가 뒤로 돌아서 나를 보고 웃는다. 그러더니 루이스가 소리친다. 

"We love you ! " 

고맙다고 얘기를 해 놓고 한참을 후회했다. 나도 당신들을 사랑하노라 얘기를 할걸.. 하고 말이다. 



포도주로 유명한 리오하 Rioja 지방의 뜨거운 포도밭을 걷고 있었다. 포도도 따먹고 무화과도 따 먹었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정말 힘들때 노래를 부르면 어느 정도 힘이 생겼다.
힘이 생기건지, 노래에 신경쓰느라 고통을 잠시 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두시간의 긴 걷기. 우리는 정말 녹초가 되어 버렸다.






로고로뇨 마을 입구에는 유명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그 분의 딸이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그 곳에 살면서 순례자들에게 도장을 찍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물이 절실히 필요했던 우리는 그곳에서 물을 조금 얻어 마셨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에 다시 힘을내서 걷는다 


이 곳에서 루이스가 어디선가 전화를 받는다. 
먼저 도착한 누군가가 루이스에게 숙소가 다 찼다고 전화를 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숙소는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며, 우리는 아주 멋진 성당에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모든것을 알아서 해 주는 루이스가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로고로뇨는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 시설이 아주 잘 되어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입구에서 부터 순례자를 위한 분수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우리는 시원한 물에 뜨거운 발을 담궈 발을 식히고, 시원한 수증기를 뿌려주는 곳에서 머리의 열기를 식혔다. 





정말 길고 힘든 오늘의 걷기가 거의 끝이 났구나 싶어 다시 힘이 샘솟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 마을 중간에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잠자리와 음식을 기부로 제공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또 힘들게 마지막으로 남은 두개의 매트를 얻었고, 루이스에게는 성당 내부에서 잘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곳에서는 영어를 위해 필리피노 사제 두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아시안이라는 이유 만으로 그들은 나를 몹시 반가워 해 주고, 특별히 와이파이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예전 필리핀에서 배운 단어들을 힘들게 기억해내서 그들에게 말해줬더니 몹시 좋아해준다. :)
그저 아주 작은 공감대, 아주 작은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즐거울 수 있었다.

 
씻고 나서 보니 우리의 친구들은 대부분 자리가 없는 맨 앞의 알베르게에 묶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이 곳에 있었다. 
독일인 라라와 그 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케샤와 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성당 내부를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루이스가 슈퍼마켓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음식도 사야하고 너무 건조한 이곳의 여름에 손과 발이 온통 갈라지고 있어서 가겠노라고 따라 나섰다. 가는길에 루이스가 클라라를 한잔 먹자고 한다. 
클라라는 아까 내가 마신 레몬맛이 나는 맥주의 이름이었다.
도스 클라라 . 클라라 두잔. 그리고 그 뒤로 클라라는 나의 절친이 되어 버렸다. 






클라라를 한잔 먹고 슈퍼마켓으로 가는 길에 정말 우연히 케이코상을 만났다. 
정말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 나는 꽤 빠른 템포로 길을 걷고 있었고, 초반부터 걷기 힘들어했던 그녀였기에 
다시 만나는 것이 불가능 하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케이코는 다리가 너무 아파 버스를 타고 이 곳에 왔노라며, 그리고 다시 만나 너무 반갑다며 길 한가운데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감동과 진심이 느껴져 내 코끝도 찡해져 왔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시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이동 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 ? 

아마 힘들 것이다. 하지만 또 만나게 되기를 바라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 준다. 부엔 카미노 ! 







성당에서는 무료로 저녁을 순례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아, 무료는 아니다.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오늘 먹는 저녁은 어제 이곳에서 묵은 순례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준비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낸 기부금은 내일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저녁 준비에 이용 될 것이다.  

다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앉았다. 익숙한 얼굴이 꽤 보인다. 

그리고 오늘은 산드라의 결혼 기념일 및 아들의 생일이었다. 
신부님의 주도 아래 우리 모두 산드라의 기념일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몹시 감동을 받았고 모두를 위해 건배를 했다. 

가족이 그립지 않냐고 물었더니, 해마다 함께 있어서 아마 그들도 내가 소중한지 모를 것이라고, 
올해가 아마 우리 가족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얘기한다. 외롭지만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는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다같이 예배당으로 내려가 미사를 드렸다.
이것이 이 성당의 오랜 전통이라고 한다. 순례자들끼리 모여 진행하는 미사도 꽤 괜찮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에게 친절한 필리피노 사제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저녁이었다. 

나는 사우로, 호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스페인어를 잘하는 루이스가 옆에서 늘 도와줬다. 
어제부터 내 옆을 늘 지켜주는 루이스가 어쩐지 참 크게 다가온다.
마음 한켠으로는 그저 그는 친절할 뿐이고 한국인을 좋아할 뿐이라고 하면서도 한켠으로는 날 좋아하는게 아닐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쩐지 미안해 바로 생각을 접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건 우리의 문화 차이 때문 인 듯도 하다. 이 곳 사람들은 만나면 늘 서로를 끌어안고 뽀뽀를 한다.
안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고, 루이스 같은 경우에는 몰리나 케샤 같은 어린 아이들도 늘 안아달라고 얘기를 하곤 한다.
한국에서는 왠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그런 일들이 단지 문화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당황하고 오해를 한다.

문화차이, 대체 어디까지가 문화차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가 알려주면 참 좋을 것 같다. 



미사가 끝난 뒤, 나는 방으로 갔다. 
우리의 젊은 친구들은 밤이 늦도록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너무 늦게 도착해 공동 침실이 아닌 1층의 사제방 옆의 작은 공간에서 자게 된 나와 산드라는 오히려 조용히 쉴 수 있음에 안도했다. 그런데 어쩐지 루이스가 보이질 않는다. 그의 부재가 꽤나 신경쓰인다. 

방의 입구쪽에 있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아까 사온 핸드크림을 손과 발에 듬뿍 바르고 맛사지를 해 준다. 
너무 건조해 메말라버린 내 손과 발이 안타깝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마사지도 끝내고, 그래도 루이스를 보지 못해 왠지 아쉬운 마음에 밖으로 살짝 나가봤다. 
그리고 계단 위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루이스와 아이세야를 보게 되었다. 

흠짓 놀랐다. 그녀의 마지막 밤이기에 그들은 함께 있고자 하는 것이리.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 본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른 내 자리로 들어가 침낭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느낌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머릿속이 뭔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이 곳에서 포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보지 말아야 할걸 봤구나..싶은 후회. 


그리고 나는 루이스가 돌아오기 전에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