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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9. Fly little bird.




2011년 8월 30일.   

 
Logrono   >  Najera  |   28.5Km   







 

아침 일찍, 나와 산드라 그리고 한 부부가 같이 사용하던 성당의 조그만 방의
안쪽 사제실에서 잠을 자던 루이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에겐 너무 이른시간, 그리고 나는 다시 잠을 잤다.

아침을 먹기 위해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 동안 루이스가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간걸까?


기부로 제공되는 간단한 아침을 먹기위해 공동 식당으로 올라갔다. 모두와 굿모닝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도 없다. 



아이세야가 나에게 혹시 루이스를 보지 못했느냐 묻는다. 보지 못하였노라 대답한다. 

늘 내 곁에 붙어서 하나하나 챙겨주던 그가 없으니 좀 허전하다. 
그리고 당장 말이 통하지 않는 브라질리언 산드라와 둘이서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한 기분도 든다.

밥을 다 먹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그는 보이지 않는다. 
짐을 챙기다가 내 가방 밑 구석에서 하얀 쪽지를 발견한다. 


루이스가 남긴 쪽지.  

머릿속이 복잡해 먼저 가겠노라노, 그리고 길 위에 있는 어떤 바에서 만나자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반으로 접혀있는 쪽지의 아랫부분에 숨겨져 있는 Fly little birds. 

어쩐지 어젯밤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그의 지금 심경이 연관이 있을거라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난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그가 쪽지를 남겨줘서 다행이고 고마웠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세야를 잠깐 마주쳤다. 
그녀에게 루이스가 쪽지를 남겼노라 말하지 못했다. 왠지 죄지은 기분이 든다. 







산드라와 함께 거의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섰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영어를 하지 못하고 나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겨우 께딸? (괜찮아?) 비엔비엔 무이비엔 (좋아좋아 아주좋아) 이정도 대화만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었고, 그저 함께 걷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있었다.

여전히 골반과 다리가 아픈 산드라와 나는 오늘도 가장 늦은 순례자 대열에 합류했다. 

느지막히 길을 걷는다. 아름다운 로고로뇨를 떠나기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한 순례자를 발견했다. 
혼자 걷던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한다. 그는 예전에 나를 보았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전혀 없었다. 
동양인이라 확실히 쉽게 기억에 남는 듯 하다. 다들 나를 꽤나 쉽게 기억해낸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가 너무나 비슷하다. 정말 다 똑같게 생긴 것 같다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순례자는 자신을 페페라고 부르라고 했다. 개의 이름은 암바다.
국제 변호사인 그는 영어에 꽤나 능통하다.
그는 나와 산드라의 중간에서 통역자가 되어 주었지만, 루이스만큼 세심하게 배려해주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조용히 혼자 걷고, 페페와 산드라는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걸었다. 
잘은 모르지만 스페인어 단어와 포르투갈어 단어를 서로 비교하는 중인 듯 했다. 

새로운 일행을 만나니 그의 부재가 더 크게 와닿는다. 





마을이 끝나가는 즈음에, 왠 길 가에 테이블을 놓고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지팡이와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례자를 돕는 분임이 분명하다. 
노란 먼지가 묻어있는 사과와 눅눅해진 비스켓, 그리고 순례자의 크레덴셜에 도장을 주는 신기한 할아버지 였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고, 브라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온 산드라와 파울로 코엘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내가 알아들은 유일한 단어다.) 
꽤나 큰 소리로 긴 토론을 한다. 무엇에 대해 토론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혼자 빈둥대며 쉬던 나는 먼지를 닦아낸 사과를 먹고, 눅눅해진 비스켓을 맛보고, 돌맹이 하나를 골라 든다. 
지팡이는 이미 파블로티 할아버지에게 받아서 괜찮다. 

분명 스페인은 카미노를 위해 사는 이런분들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럴 것이다. 


꽤나 긴 시간을 그곳에서 머문 우리는 또다시 갈 길을 재촉한다. 
나는 얼른 다음마을이 나타나서 루이스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다음 마을은 꽤 멀었다. 

중간중간 길 옆의 나무에서 배를 따 먹고 무화과를 따 먹어가며 두시간여를 쉬지 않고 걸었다. 


마을이 나타났다. 커피타임을 가지자고 얘기한다. 
늘상 첫번째 마을에서 티타임을 가지던 산드라와 나는 신나서 바를 찾아 들어간다. 
루이스가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그는 마을에 하나뿐인 그 바에 없었다. 내 마음이 실망하는것이 느껴졌다. 

지난번 어느 마을에선가 사 놓은 민트초콜렛을 함께 나눠먹고, 짧은 티타임을 끝내고 다시 길을 걷는다. 
원래는 삼십분 정도를 여유있게 쉬다가 가는데, 낯선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의 긴 티타임이 십분으로 줄어버렸다.
그의 부재가 또다시 실감난다. 

마을에 하나 있는 교회를 두리번 거렸다. 모든 교회를 유심히 보는 루이스이기에 혹시나 그곳에 있을까 해서..
그는 없었고, 나는 또다시 뭔지 모를 실망감에 휩쌓였다. 


다음 마을은 또 꽤나 멀었다. 그를 과연 다시 만날수는 있을까 ? 걱정이 된다. 



마을이 끝나가는 삼거리. 우리는 왼쪽길로 가야했다. 
반대쪽인 오른쪽 길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곳에서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루이스가 나타났다. 
우리를 발견한 그는 우리쪽으로 뛰어왔다. 반갑고 기뻤다. 

재회의 인사를 나눴다. 산드라도 몹시 기뻐한다. 
그리고 발에 물집이 엄청나게 잡혀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까뜨린도 만났다. 세명이 다섯명으로 늘어났다. 







스페인어도 할 수 있는 루이스는 페페와 산드라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는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냥 함께 걷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었기에 굳이 묻지 않고 걷는다. 

나는 까뜨린과 함께 침묵 속에서 길을 걸었다. 
사실 침묵은 아니다. 까뜨린의 배낭은 그녀가 발걸음을 움직일 때 마다 뭔지 모를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다.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닌 우리 둘은, 그 소리와 함께 리듬을 타 가며 그저 걷고 있었다. 


그늘이 없는 뜨거운 길이 계속된다. 









 
카미노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에 늘 해가 우리 등 뒤에서 떠올라 왼쪽 옆을 비추다 앞으로 사라진다. 
미처 그 몸을 숨기지 못한 달은 늘 우리 정면에서 우릴 보고 웃고 있다. 

배낭의 왼쪽 주머니에 물통을 넣고 걷던 나에게 루이스가 이렇게 하면 물이 뜨거워지니 반대쪽으로 넣어보라고 한다. 
아, 역시 그는 현명하다. 그 뒤로 나는 더이상 뜨뜨미지근한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다들 지쳐간다. 

루이스가 산드라와 페페에게서 빠져 나와 까뜨린 사이에서 함께 걷는다. 
다들 지쳐서인지 별 말이 없이 길을 걷는다. 

뜨거운 태양아래를 끊임없이 걷다보면, 정말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그저 걷고, 그늘이 보이면 쉬는 것. 그것이 전부다. 


오늘 처음으로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 까뜨린은 루이스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무슨일을 하니? 부터 시작된 질문은 내가 묻지 못한 모든 루이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카메라 디렉터였고, 포토 그래퍼였다. 
리스본에서 살며 밤낮없이 일을 해대던 그저 요즘 사람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 

그리고 모든 바쁜 인생을 정리하고 도시 외각의 한 곳에 약간의 땅을 사 그곳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전기가 없고 물이 없다. 전기는 태양열 패널 하나로 충당하고, 물은 빗물을, 냇물을, 그리고 수돗물을 길어서 쓴다고 한다. 화장실은 따로 있긴 한데 물과 전기는 없다. 그는 그 곳에서 7년째 살고 있고, 해가 뜨는 것이 바로 보이는 그 집이 너무 좋기 때문에 다른 곳 어디로도 가기가 싫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꼭 놀러오라고, 자신의 공간에는 친구를 위한 집이 한 채 더 있고, 종종 그곳에서는 친구들이 머무르다 가노라며 의심많고 겁 많은 독일인과 한국인을 초청한다. 

카미노는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가던 중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뒤면 친구들이 다시 돌아가다가 자신을 픽업해서 포르투갈로 돌아간다고 한다. 

아, 돌아간다고 ? 

조용히 길을 걷는 척 하면서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나는 그와 너무 짧은 시간밖에 함께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저 조용히 길을 걷는다. 머릿속 생각을 밖으로 내뱉지 않는 연습을, 생각한 다음 말하는 연습을 정말 제대로 한 듯 하다.


한참을 걷다가, 루이스에게 쪽지를 남겨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세야가 나에게 너의 행방을 물었는데, 쪽지를 발견하기 전이어서 대답해주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는 괜찮다며, 나와 아이세야 둘 다에게 쪽지를 남겼고, 그녀에게 쪽지를 확인했다는 문자를 받았노라 말한다. 

아.. 괜한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긴 대화에는 꽤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에 우리 모두는 지쳐 결국 침묵만이 남게 되고, 유독 샘이 없었던 길이었기에 모두의 물통은 비어갔다.


 




너무 뜨겁고 너무 힘들다. 
하지만 우린 함께 걷고 있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었다. 

물이 없어 정말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포도를 따 먹는 것으로는 수분보충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묵묵히 길만 걷는다.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앞을 보니 뜨거운 햇볕을 잠시 피해갈 수 있게 흙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글루 같이 생긴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온 두명의 여성 순례자였다. 그들은 젊었고, 몹시 활기찼다. 
그녀들에게 약간의 물을 얻고, 우리는 저 곳에서 살짝 쉬어 가기로 한다.

돌로 만든 조그마한 집 입구의 아랫쪽에 누군가가 너무 이쁜 꽃을 그려 놓았다.
이 뜨겁고 삭막한 길 위에 그려져 있는 작지만 싱싱한 붉은 꽃, 꽃도 그 꽃을 그려 넣은 이의 마음도 너무 이쁘다.



 


발이 너무 아프다. 신발이 좀 작고, 너무 오래 걷다보니 발이 정상일 수가 없다.
발목도 아프고 발가락도 아프다. 당장이고 신발을 벗어버리고 싶지만 산길이라 플립플랍을 신고 걸을수는 없었다. 
몇몇 발톱들이 빨갛게 부어가고  있었다. 점점 붉어지고 부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남들이 다 고생하는 물집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들로 나는 괴로워 하고 있었다. 




 

발들에게도 잠깐의 휴식을 주고, 우린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린 오늘도 가장 늦은 순례자들이었고, 어디선가 전화를 한통 받은 루이스가 길을 재촉한다. 
우리가 가야 할 숙소에 자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근처에 다른 숙소들이 있으니 걱정말자고 한다.


길은 참 지루하게도 이어졌다. 이렇게 마을도, 샘도 없는 구간은 처음인 것 같았다. 
갈증을 참다 못한 산드라는, 길 옆에 있는 한 가정집의 벨을 눌러 물을 구한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도 많는 물을 조금씩 나눠서 마신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전장에 버려진 군인들인가? 아무튼 수통은 하나였고, 모두들 목이 말랐다. 
모두 돌아가며 물을 조금씩 먹기로 했는데, 한바퀴를 돌아도 물이 줄지 않았었다. 
왜냐면 모두가 더 목이 마를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물을 먹는 시늉만 했기 때문이라는 아주 훈훈한 내용의 이야기. 

나도 그 물통을 받아들긴 했지만 물을 먹진 않았다.
나보다 더 목이 마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 갈증은 조금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말이다.

그냥 이 마음이, 이 따뜻한 사람들의 이 아름다운 마음이 너무 좋다.



결국 우리는 나헤라에 도착했다. 

꽤나 큰 마을이었고, 마을의 가운데로는 아름다운 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천의 양쪽으로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 이 곳에서는 사진도 찍지 못했다. 너무 아쉽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숙소, 우리의 젊은 친구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는 이미 만실이었다. 
뒤늦게 들어서는 우리를 모두가 반겨줬다. 안아주고 볼뽀뽀 해주기. 
처음에는 낯설기만 한 이 인사가, 이제는 익숙하고 좋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맞닿는 것, 얼마나 기분 좋은 스침인지 ! 


숙소 주인이 알려준 사설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곳은 8유로, 3유로인 시립 알베르게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퀄리티는 아주 훌륭했다.
한방에 침대가 8개 밖에 없었다 ! 늘 수십명씩 자던 알베르게에 비하면 얼마나 훌륭한 사이즈인지 ! 오 감사합니다. ㅎ

우리 모두는 이런 좋은 숙소에서 머물 수 있게 해 준 루이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오늘 길을 함께 걸은 페페는, 자신의 차를 가져오기 위해 콜택시를 불러 로고로뇨로 돌아갔다.
그의 개는 알베르게에서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차를 가져와 개를 재워야 했다.


씻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우리는 내일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발이 아파 맨발로 걷겠다는 루이스에게, 예전 팜플로나에서 착한 순례자에게 선물받은 플립플랍을 주었다. 
감동받은 눈빛, 고맙다고 나를 꼭 껴안아 준다. 


my pleasure ~ :D 



슈퍼마켓은 마을의 초입에 있어 꽤나 먼 길을 가야했다.
하지만 배낭 없이, 플립플랍을 신고 걷는 그 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쉬운 길이었다.

가는길에 시립 알베르게에 들러 우리의 친구들과 또 약간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저녁을 해 먹기로 했고,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사 먹기로 결정한다. 우린 도무지 밥을 해 먹을 힘이 없었다. 

루이스는 그들에게 내일은 자신의 마지막 걷는 날이라고 얘기한다. 돌아가야 하노라고, 친구들이 픽업을 오기로 했다고 말한다.
모두가 슬퍼한다.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자고 청했지만, 저녁 후에 맥주 한잔을 함께 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온다.  


슈퍼마켓으로 가는 길에, 뒤늦게 들어오는 안토넬로와 알렉산더를 만났다. 그들은 아이세야를 배웅해주느라 늦게 출발했다고 한다. 웃통을 벗고 얼굴이 시뻘개져서 노래 부르며 돌아오고 있는 그들은 살짝 제정신이 아닌 듯이 즐거워 보였다. 

술마셨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펄펄뛴다. 아마 마약을 했을거야 라고 루이스가 나에게 말해준다. 그런것 같다.
그들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아마 방이 없을 그들에게 우리의 숙소를 알려주고 우리는 다시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내일 먹을 빵과 햄, 치즈를 샀다. 그리고 저녁 후에 마실 맥주와 레몬쥬스, 그리고 수박을 샀다.
저녁을 먹고 강 옆의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 ! 완벽한 계획이었다.


페페가 돌아왔고, 우리는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가서 순례자 메뉴를 먹는다. 


보통 10유로 정도에 제공되는 순례자 메뉴는,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메뉴에 와인이나 물 한병이 제공된다.
합리적인 금액에 조금 많은 듯한 양. 하지만 이것이 스페인 스타일임을 아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이스와 페페, 산드라는 서로의 언어에 대해 끝도 없는 토론을 하는 중이다.
나는 까뜨린과 간간히 대화를 나눠가며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들이 나와 까뜨린의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보고는 조용하고, 침착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말한다. 

뭐 ? 내가 ? 

조금 놀랐다.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냥 걸을때 조용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알고 한번씩 하는 말들이 아주 현명하게 들린다고 이야기 해 준다. 까뜨린도 동감한다. 

걸을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나에게 묻는다. 

난 그저 침묵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라 대답한다. 내가 늘 그러지 못했기에.. 

내 대답에 페페가 깜짝 놀라 왜 그런걸 연습하냐고 되묻는다. 루이스가 좋은 도전이라며 나 대신 답을 해준다. 고맙다. 

사실 걷기도 힘들고, 영어를 듣고 해석하고 답변을 만들고 다시 영어문장으로 만들어 입 밖으로 내려다 보면 나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러는 동안 화제가 바뀌거나 대답할 필요가 없어져버려 말을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언어의 제약이었다 바로.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calm 하다는 평가를 들은 그날, 어쩐지 나는 앞으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말로 하면 전혀 끊김없이 거침없이 생각나는대로 다 말하곤 했던 예전의 내가 아닌, 
말하기 전 한번 더 생각하고 다시 곱씹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을 했다. 나는 말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단어에 대한 각 나라별 용법에 대해 다시 토론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갑작스런 숙제를 던지고선 말이다.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한 하루였기에 얼른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때 가게로 들어서는 안토넬로와 알렉산더를 발견했고, 그들은 우리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3개 국적의 대화는 이탈리아노가 추가되면서 4개 국적의 대화로 이어졌다.

쌓여가는 와인병 속에 지루하고 힘든건 까뜨린과 나 뿐이었나보다.  


투덜투덜대며 둘이서 앉아 있었다. 간간히 안토넬로를 놀려가며, 알렉산더와 함께 얘기도 해 가며, 그렇게 두시간이 흘러갔다. 
저녁을 길게 먹은 것은 좋으나, 시간이 흘러 알베르게 문이 닫힐 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저녁 맥주는 모두가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고, 너나 할 것 없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조용한 방에 작게 울려 퍼지는 서로의 숨소리, 이 정도 숨소리면 정말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위의 침대를 쓰는 루이스의 작은 뒤척임. 크게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느껴진다. 


Fly little birds. 어쩐지 내 머릿속에도 한마리 작은 새가 생기려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