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돌아 나오며, 성당이 바로 보이는 카페에서 비싼 커피 한잔을 마셨다.
다른 카페보다 두배정도 비싼 커피값에 자리값을 받는 것 같다고 투덜댔지만,
산티아고 대성당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은 그럴만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녀올게 산티아고, 몇일뒤에 또 보자 !
산티아고를 나가는 순례자는 거의 없는 듯 했다.
피에네스떼레까지 걸어가는 순례자가 별로 없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듯 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늦어서 아무도 안보이는 걸 수도 있다.
산티아고를 돌아 나오는 길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들은 정갈하고 깨끗했으며 아기자기했다.
누군가가 신경써서 세워 놓은 듯한 노란 작은 호박이 귀엽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도 있다.
내 뒤를 걸어 올 누군가도 이 호박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길 바래본다.
표지판이 틀렸다. Santiago는 반대쪽에 있는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면서 Camino de Santiago라 한다.
순례자를 배려 한 것이지만 거꾸로 산티아고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어쩐지 혼란을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풀밭과 하늘과 표지판의 조합이 너무 이뻐서 그냥 웃고 만다.
아무렴 어떠한가 ! 조금 틀리면 어떠한가 !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인데 !
작은 마을을 벗어난 길은 나지막한 숲으로 이어졌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숲길을 걷는다. 아틸라는 보이지 않았다. 저 앞 어딘가를 걷고 있으리.
느지막히 출발한 덕인지 순례자를 단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숲이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걷는다.
조그마한 커브길을 돌자마자 왠 사람이 한명 서있었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그 아저씨 순례자는
길 가에 서서 자위를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일단 그를 못본 척 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그를 지나쳐 가자 마음 먹었다.
속도를 늦춰서도 안되고 빠르게 지나가서도 안될 것 같았다.
유독 조용하고 한산하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길 위의 한명의 이상한 사람이 내게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아무도 없는 것 보다 사람이 몇명 있는 것이 더 무서운 것 같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보다 날 뒤따르거나 혹은 가로등 밑에 누군가가 서 있는 골목길이 더 무서운 것 처럼 말이다.
아틸라가 앞에 있을거라는 생각이 그나마 내게 용기를 주었다.
얼른 가서 그를 만나야겠다 생각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또 다른 커브를 돌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틸라를 만났다.
"괜찮아? 혹시 저기 이상한 사람 없었어? "
"응. 왠 아저씨가 이상한짓 하고 계시던데?"
"봤구나. 혹시나 싶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니가 혼자 왔다고 생각할까봐. 같이 걷자."
"휴.. 그 앞을 걷는데 진짜 무섭더라. 기다려줘서 고마워. "
우리는 왜 그 아저씨가 숲이나 좀 으슥한 곳을 찾지 않고 바로 길 가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저 우리와 같은 순례자였으니까.
그도 그가 길에서 자위 하는 것은 이해는 하나 장소가 너무 이상하다 말했다.
왠지 아틸라가 더 민망해하는 듯한 기분이다. 같은 남자로써 수치스러웠나 ?
이런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우습다. 혼자였으면 너무도 두려웠을 그 상황이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내 곁의 이 듬직한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 든다.
산길이 끝나고 몇 채의 집들이 나왔다. 그리고 엄청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풀밭을 가로질러 끝까지 왔다.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준비해온 과일과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란히 앉아 저 길로 그 변태아저씨가 지나가지 않을까 지켜보면서 말이다.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가득한, 너무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매 순간이 참 경이롭다. 햇살, 바람, 하늘 그리고 나무들은 언제나 새롭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는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같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 경이로움 속에서 나는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작아지고 작아져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버리는 나를 느낀다.
결국 그 아저씨는 우리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각각 적당한 장소를 찾아 볼일을 보고서 다시 길을 걷는다.
인간 본연의 욕구에 충실할 것, 처음에는 그렇게 힘들던 것들이 이젠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아무데서나 자위를 하는 그런 욕구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그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와 함께 있을땐 소변문제 때문에 참 많이 고민했었는데.. 나에게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들.
프레야와 아틸라, 두사람 모두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집들이 참 예뻤다. 비슷한 색깔의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걸으며 봐 왔던 스페인의 모습들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깨끗한 마을위로 이어진 아스팔트 길 위를 걸으니 뭔가 새로운 시작이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든다.
산티아고를 향해 걷던 카미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산티아고만 바라보며 걷던 이전의 날들과 비교하면, 이젠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아틸라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오늘 그는 몹시 의욕이 충만하다.
얼른 피에네스떼레에 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끝을 만난 다음,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말했다.
그의 작은 세상을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며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겠노라 말한다.
자신의 이 변화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무엇인가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말하는 그의 눈빛이 몹시 반짝인다.
"아마 그렇게 될거야."
자신의 조국 헝가리를 몹시 사랑하고, 자신의 작은 마을을 위해 자기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나는 그가 그 일들을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안다.
믿는대로 이루어 진 수많은 일들, 내게 일어난 기적같은 수많은 경험들.
가만히 놓고 생각해보면 나의 삶들은 모두가 기적이었다.
be all I can be.
나는 늘 내가 믿는대로 된다는 것을 믿어왔고, 많은 것들이 믿는대로 이루어 졌었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있게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결코 나만이 내 삶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나를 주인공으로 살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순간들, 그리고 선택들.
수 많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펼쳐지는 아름다운 삶 속에서 그도 나도 반짝이는 주인공이리라.
바람이 참 좋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참 좋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그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참 기분좋은 일이다.
어쩐지 바람은 늘 나를 들뜨게 만든다.
바람을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예전에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바람만 기다리며 흔들리던 나무였을지도 모른다.
따사로운 대낮의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 앞에 누군가가 포도를 내려 놓았다.
고양이는 많이 졸렸는지 내가 사진을 찍어대도 눈도 뜨지 않는다.
동물들도 잠자는 나른한 오후시간, 그들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우리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고양이를 지나 이어지던 길은 다시 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꽤나 가파른 산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한발 한발 막대기를 짚어가며 조금씩 올라간다. 너무 힘들어 쉬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오르막의 끝에서 쉬기로 하고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산을 올랐다.
산 길 옆으로는 아스팔트로 된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길, 그리고 이렇게 힘들어 걸어 올라가야 하는 길이 나란이 있는 것이다.
차가 지나가면 히치하이킹을 하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는 한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
마지막 오르막길은 정말 가팔랐다. 메마르기까지해 미끄러질까봐 주의를 기울여 발을 옮겨야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그 오르막길도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끝나고 만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올라오느라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벤치가 놓여져 있었다.
가방을 벗어 던지고 신발과 양말도 벗어 던졌다. 발에 불이 났다.
벤치에 앉아 초콜렛을 나눠 먹는다. 아틸라는 담배를 말아 핀다. 그가 담배피는건 정말 언제봐도 보기 좋다.
물론 건강에 좋지 않겠지. 하지만 그 행복과 여유가 가득한 얼굴을 보고나면 말릴수 없다.
게다가 그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분명 적당히 알아서 조절 할 것이다. 자기 몸을 스스로 망가뜨리진 않을 것이다.
"오! 지니, 이것봐. 이건 헝가리 말이야! "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의 뒷쪽에 쓰여져 있던 낯선 언어가 헝가리어라며, 그는 몹시 반가워한다.
약 한달쯤 전에 쓰여진 낙서, HAJRA는 화이팅! 대충 이런 의미라고 했다. VAMOS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는 펜을 꺼내 들더니 벤치에 똑같은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펜이 얇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낯선 스페인 땅에 내 이름을 남겼다. 낙서하는 그가 귀엽다.
다음에 저 길을 다시 가게 된다면, 나는 이 흔적들을 다시 찾게 되겠지.
하트로 쌓여진 JINEY와 ATTILA. HAJRA !!
유치하다. 유치하면 뭐 어떤가. 좋으면 그만이지 !
간만에 하는 이 유치한 낙서가 즐겁다. 유치하지만 마음이 참 즐거웠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낙서겠지만,
JINEY와 ATTILA 에게는 정말 소중한 흔적이 되겠지.
2011년 9월 25일에 그와 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
우리 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낙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마음이 저 돌벤치 위에서 오래오래 남아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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