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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피스테라 가는 길 D+37. 마지막 걷기의 날.




2011년 9월 27일.   


Olveiroa    >   Fisterra   |   31 Km  





깜깜한 어둠속에서 길을 시작했다. 
30여 키로미터를 걸어 피에스테레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끝마을에 도착하고 싶어 평소보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아침 6시, 아직도 세상은 깜깜했고,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는 순례자들의 랜턴만이 어둠을 간간히 밝혀주고 있었다.


어둠속을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 가로등 불빛하나 없는 그 완전한 어둠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도 비춰주지 않고 있었다. 랜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힘들게 길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리가 가려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누군가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에 선명한 노란 화살표가 있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화살표를 찾지 못한것 같다. 


"hey ~ "


아틸라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그를 불러세운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우리와 합류했다.
혼자 이 어둠속을 걷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일것 같다. 그는 연신 우리에게 고맙다 말한다. 

길은 곧장 산으로 이어졌다. 까만 산길을 걷다보니 무서움이 솟아올랐다. 
조금 앞서 걷는 아틸라와 새로운 일행의 뒤를 빠짝 쫒아 걸었다. 
짐승 우는 소리가 한번씩 들릴때마다 나도 몰래 움찔거리고 있었다. 


내 한발짝 앞만 비춰주는 약한 불빛에 의지한채, 땅만 바라보며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까만 어둠속에서 길을 걸었던 것은 레온에 도착하기위해 40여키로를 걸어야했던 날 하루 뿐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달이 밝아 이렇게 어둡진 않았었다. 달도 없는 이런 까만 새벽은 처음이다. 

이렇게 까만 어둠속에서 매일 걷는, 매일 여섯시쯤 출발하는 순례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땅을 볼 수 밖에 없는, 아무것도 볼수 없는 까만 어둠속을 걸으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내게 까맣고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을 쓰느라 신경이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는 듯 했다. 
내 앞에 두 장정이 있어도 이렇게 무서운데, 이 길을 혼자 걸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싶다. 

까만 숲속 저 멀리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날이 밝아지면 근처에 바다가 보이지 않을까 상상하며 길을 걷는다. 



세상이 아주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이제는 내 발 밑의 땅도, 길가의 나무도 잘 보인다. 
바다는 없었다. 내 귀에 들린 파도소리는 바람이 만들어 낸 환청이었나보다. 






오늘도 숲은 안개가 자욱했다. 새로 만난 독일인 동행도 꽤나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아틸라와 독일인 옌스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 가며 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들도 알고보면 꽤나 수다쟁이들이다. 



앞만보고 안개속을 걷는 우리의 등 뒤로 붉은 기운이 퍼져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해가 뜨려나 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멈춰서서 뒤로 돌아보았다. 



"우와! 완전 멋있다! "



우리의 눈 앞에는 믿을수 없는 엄청난 일출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들은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구름은 놀라운 모습으로 아침햇볕을 반사하면서 우리에게 흡사 V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의 걷기가 끝나는 날, 우리보고 잘 했다며, 너희들이 승리자라고 Victory 라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자연이 준 이 엄청난 선물 앞에서 우리는 이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만난 둥근 무지개도, 오늘만난 이 놀라운 일출도, 그 시간에 그 길을 걷고 있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길이 우리에게 주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선물들에 오늘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한참을 그 곳에 서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승리의 V는 해가 점점 떠오르면서 사라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하늘로 돌아왔다. 


조금전에 만난 핑크빛 기쁨이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 다들 어쩐지 신나 있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온 산길은 다시 아스팔트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 가에 나타난 작은 바에서 우리는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도롯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바에는 아주 어린 꼬마아이가 엄마를 도와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 여덟시도 안된 이른시간, 일찍 일어나 엄마를 돕고 있는 꼬마가 왠지 기특하다.(자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뭔가 많이 팔아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커피와 함께 테이블에 놓여있던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나를 따라 아틸라와 옌스도 각각 파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였다면 하나를 사서 나눠먹었겠지만,  

이 곳 사람들은 하나를 나눠먹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그냥 각각 사도록 내버려 둔다.







주인 아주머니가 예쁜것은 여자가 먹어야 한다며 나에게 특별히 체리가 올라간 부분을 주셨다.



"무챠스 그라시아스~" 



운도 좋고 기분도 좋은 아침이다. 



셋이서 나란히 밖에 앉아 커피와 파이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일인 옌스는 대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힘든 코스라고 소문난 놀던웨이로 카미노를 걸어 이 곳까지 왔다고 했다.

얼굴은 나보다 한참 많아 보이는데 나보다 어리다. 외국인들의 나이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내년이면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야하는 옌스는 그의 마지막 학창 시절을

마무리 하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학생인 그에게는 나와 아틸라의 이야기가 

신기할 뿐이었다. 특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별 생각 없이 지구를 반이나 건너온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예쁜 두 눈을 반짝이며 연신 "Amazing!"을 외친다. 그렇게 놀랄것도 없는데 말이다. 

반짝이고 맑은 예쁜 눈을 가졌다. 루이스의 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이들을 보면 내 마음도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눈도 저렇게 반짝일까? 



 나도 아틸라도 옌스도, 이 길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다. 

모두 각각의 삶에서의 전환점에 서 있다. 원하는 바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이 길이 끝나고 나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비단 이 길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 중 아주 일부만이 이 길 위에 있는 것이겠지.







차를 마시고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묵시아와 피스테레의 갈림길이 나왔다. 

묵시아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피에네스떼레에 먼저 가기로 했기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피스테레에서 상황을 보고 가능하다면 묵시아에도 가 볼 것이다. 

아직은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아스팔트길은 단조롭고 메마른 산길로 이어졌다. 아틸라와 옌스는 앞서가고 나는 그들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며 뒤따라 걷는다.



피에네스떼레라는 끝을 남겨둔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쳐간다. 한결같이 얼굴이 밝은듯한 느낌이다. 

오늘만 걸으면 끝이니 조금만 더 힘을내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길을 걷는다. 

산티아고를 앞두고 느꼈던 두려움이나 산티아고를 떠나며 느꼈던 불안감 따위는 이제 없었다. 

걷다보니 모든것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일만같이 느껴진다. 그저 탁 트인 드넓은 바다가 보고싶을 뿐이다. 

능선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바다가 나타나길 손꼽아 기다리면서 걷는다. 



독일인 옌스는 너무 느린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길 중간에 앉아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은 아틸라 뿐이다. 

길 가에 나란히 앉아 아침에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길 위에서 먹는 마지막 점심이었다. 


늘 나를 기다려주는 아틸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나로 인해 그의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나는 늘 그에게 미안해했고, 

그는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라며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혼자 거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나는 더이상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게 되어 있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이 먹고 움직인다. 그러다보면 같이 배고파져 또 같이 먹는다. 

배고픈 시간도 졸린 시간도 같았다. 짧지만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맞춰져가고 있었다. 


그와 이별해야할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젠 어쩐지 걱정되지도 슬프지도 않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시간을 걱정하며 낭비하기엔 지금이 너무 아깝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힘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오늘도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저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을 한번 바라보고는 씨익 웃을 뿐이다.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나보다. 저 산아래의 마을이 해무로 덮여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 커브길을 돌자마자, 거짓말처럼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몇번 보지 못했다고 하는 아틸라는 눈 앞에 펼쳐진 바다에 감동한다. 

늘 바다와 함께했던 나도 왠지모를 감동이 느껴진다. 

한 달을 넘게 끝이 없을것 같은 땅만 걸어온 우리에게 바다는 특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고 반짝이는 별을 따라 이 길을 걸었을 아주 예전의 순례자들은 어땠을까? 

그들의 기분도 지금 우리처럼 감동으로 벅차올랐을까? 아마 우리보다 더 큰 감동을 느꼈을 것 같다. 

바다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걸은 자와 모르고 걸은 자의 감동은 같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얼른 저 바다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꽤나 높은 곳에 있었던 우리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힘든 내리막길이 이어졌고, 우리는 저 위에서 바라보았던 작은 항구마을에 도착했다. 

Cee 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항구마을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씨. Cee 지만 어찌됐던 바다는 바다다.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광장에 있는 케밥집에서 케밥과 콜라를 먹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케밥을 먹으며 마을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의 마을이었다. 유독 키가 작은 아저씨들이 많이 돌아다녔고, 흐린 날씨때문인지 표정들도 잔뜩 흐렸다. 

70년대의 탐정들 속에 우리 둘이 낯설게 앉아 있고, 그들은 뭔가를 캐보려 우리를 계속 훑어보는 듯 했다. 


정말 이상한 분위기의 마을이라며 둘이서 스릴러 드라마를 만들어가며 케밥을 먹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허황된 소리를 함께 나누고 있음이 좋다. 


케밥을 먹고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길은 저 도시 한가운데로 지나가라 말하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바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우리는 조금 멀어 보이는 백사장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가까이서 본 백사장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미역이 널려 있었고, 어쩐지 물도 그리 깨끗해보이지 않는다. 


항구와 해변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며 서로의 실망감을 달래주었다. 

아틸라가 갑자기 날 부르더니 불쑥 나팔꽃을 내민다. 짙은 보라색의 예쁜 꽃이었다. 

 








나팔꽃을 머리에 꽂고 조금 걷다가 꽃잎에 키스를 담아 바다로 던졌다. 

소금물에 치이다 꽃잎은 금새 시들어버리고 말겠지만 내가 이 곳에서 저 꽃을 바다에 던진 기억은 오래 남겠지. 


엄청나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필요는 없다. 시들어가는 한송이 꽃과 같이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괜찮았다. 

그 순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그저 누군가 특별한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바닷가를 돌아 화살표를 다시 찾았을 때 아틸라가 갑자기 발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남은 10키로를 더 걷기 위해서는 그의 신발에 깔려있는 "매직카펫"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 말한다. 


"매직카펫"은 말 그대로 여자들이 한달에 한번씩 사용하는 그 물건이다. 

아틸라가 온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하고 있을 때 한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레로가 그의 다 벗겨진 발을 보고 

"매직카펫"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고 했다. "매직카펫"의 수분흡수 능력은 아마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매직카펫"덕에 늘 뽀송뽀송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 그 다음부터 그는 물집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여분의 매직카펫이 없었다. 

호스피탈레로에게 여분을 몇개 더 받았지만 몇일 전 폴란드인 순례자에게 주고 말았던 것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매직카펫은 되려 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고, 남은 10km를 걷기 위해선 꼭 뜯어내야만 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사기엔 또 너무 많이 남아 고민하는 그에게...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서 내껄 주겠다 말한다



"정말? 오 고마워~ "



기뻐하는 그에게 나의 매직카펫을 주섬주섬 꺼내서 주었다. 

그런데.... 초울트라슬림이 트랜드인 한국 스타일의 매직카펫은 그에게 전혀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 큰 용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의 매직카펫은 전체를 다 펼쳐도 그의 신발 밑창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맙소사... 



"Thanks but it's too small for me and you are so small chikitita. :)"



진지한 표정으로 아틸라가 말을 했다. 어쩐지 이 상황이 너무 웃겨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수퍼마켓에 들러 그가 원하는 "매직카펫"을 샀다. 아니, 그가 샀다. 

이런걸 자신을 위해 사는날이 올 줄은 몰랐다며 멋쩍어 했지만 난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낄낄대며 그를 지켜보았다. 


수퍼마켓 앞에 앉아 매직카펫 교체작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 장면을 보면 뭐라 얘기할까 궁금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장인의 정신으로 꼼꼼하게 교체작업을 마치고, 아틸라는 남은 8개의 매직카펫을 내게 준다. 

아마 내가 쓸 일은 없겠지만 그 보단 쓸일이 많을 거라 얘기하며 말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난리법석을 떨고나서 보니 시계는 어느덧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시는 우리가 피스떼레에 도착하고자 계획했던 시간이었다. 어쩌다보니 Cee라는 마을에서 두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마지막 걷기는 조금 부지런을 떨어 일찍 목적지에 도착하려 어제부터 마음 먹었는데..

역시 우린 어쩔수 없나보다. 기왕 이렇게 된거 별수 없다며, 그래도 해지기 전엔 도착하자 말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마을을 지나서 길은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졌다. 가파른 언덕을 넘고 구불구불 동네 사이사이를 지나간다. 

점점 멀어지는 예쁜 항구마을을 뒤로한채 우리는 다시 바다가 보이지 않는 숲길로 들어섰다. 


레몬 나무들이 간간히 보였다. 나무에 달려있는 레몬들을 보니 뭔가가 새롭고 신선하다. 

레몬나무를 눈으로 본 게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 



숲길은 아스팔트로 다시 이어지고 아스팔트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지길 몇번, 다시 바다가 나왔다. 

길은 구불구불 바닷가를 따라 아스팔트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팔트길의 끝에는 정말 아름다운 해변이 있었다. 

저 해변에서 꼭 쉬어가자 얘기하며 우린 힘을 내서 길을 걷는다. 



따각 따각. 아스팔트를 내려찍는 쇠막대기의 소리가 날카롭게 귀로 파고든다. 참 듣기싫다. 

나무 막대기가 내는 통통 하는 소리와는 너무 다른 등산용 철제 스틱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순례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들의 이기심이 안타까웠다. 우린 저런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말자 얘기하며 길을 걷는다. 



내리막길의 끝에서 해변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를 찾았다. 야호 ! 











오며가며 자주 마주친 브라질에서 온 세 젊은 순례자들이 젖은 몸을 해변에서 말리고 있었다. 

(그들은 셋다 히피처럼 자유로운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히피였을까? )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우리도 가방을 벗어 던졌다. 아틸라는 쉴 틈도 없이 바로 웃통을 벗어 던졌다. 



"조심해 ! 보기보다 물이 차가워!"



젖은 옷을 가방에 걸고 돌아 나가던 브라질리언 순례자가 아틸라에게 소리쳤다. 



"고마워!"



그리고 아틸라는 반바지만 입은 채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그러더니 차갑다며 금새 돌아 나오고야 만다. 

진짜 차갑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고야 말았다. 


신발을 벗고 나도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식혔다. 차갑긴 진짜 차가웠다. 

그래도 바다에 발을 담그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조그만 나의 돌고래 비치 타월을 깔고 둘이 나란히 누웠다.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과 시간인 듯 했다. 


아틸라의 팔을 베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그를 살짝 안았다.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의 체온이,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그렇게 가만히 그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다리에 붙어있던 물방울들을 말려주고

파도는 찰싹찰싹 부드럽게 해변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가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낸다. 


영화에서나 봐 오던 로맨틱한 순간이 지금 내게 펼쳐졌고, 나는 꿈결같이 행복했다. 




"내 생애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기까지 했던 순간은 처음인 것 같아. 정말 고마워." 


"나 역시 그래. 모든게 다 고마워." 




행복을 알고 감사를 하는 것, 적어도 우린 둘 다 자신의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알았다. 

모든것에 감사하는 사랑 앞에서는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모든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그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준 이 사람을 나는 영원히 사랑할 것 같다. 

비록 함께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쉬다가 다시 길을 걷기로 했다. 

입구에 있는 바에서 오렌지쥬스 한잔을 사 마시고 화장실도 들렀다. 

마지막 한시간을 위한 준비를 끝마치고 우린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언젠간 이 아름다운 해변에 꼭 다시 오겠노라 얘기하며, 우리에겐 너무도 아름다웠던 순간을 남겨두고 걷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이 추가된다. 이 모든 것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단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모든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머릿속에 하나하나 다시 집어넣는다. 

정말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이 모든 순간을. 





저 멀리 피스테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위로 이어져있는 길을 걷는다. 드디어 끝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하다. 


우리는 별 말없이 길을 걸었다. 아틸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머릿속이 공허한 듯 하면서도 복잡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의 움직임에 마음이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궁금하다. 



눈 앞에 보이던 피스테레는 정말 가도가도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이 저 멀리 있더니, 어느새 우리앞에 다가와 있었다. 

여기가 피스테레였다. 끝을 반기는 환영인사도,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는 무언가도 없는 그냥 조그만 항구마을이었다. 


엄청나게 큰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알수 없는 허탈함이 마음속에 퍼져 올라왔다. 

나보다 더 피에네스떼레를 원해왔던 아틸라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시에 대한 실망이라기 보단 그저 그가 꿈꿔온 마지막과 맞닥드릴 준비가 안됨에서 온 실망이었으리라. 



마을 중심으로 올라가 알베르게에서 마르셀을 찾았다. 역시나 그를 찾을수는 없었다. 

우리의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위해 밖으로 나갔다. 피스테레의 해변에서 다시 만나자던 마르셀은 찾기 위해 

엄청 두리번 거렸지만 그를 만날 순 없었다. 버스를 타고 이 곳에 온 그가 3일을 머무를 만한 마을이 아닌 듯 했다. 

그는 아마 진작에 이 곳을 떠났을 것 같았다. "Yes, it is." 라고 특유의 악센트로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를 흉내내가며 

우리는 그렇게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아침에 만난 독일인 옌스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마 어디선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짐을 풀고 따뜻한 물로 지친 몸을 달랬다. 걷기가 다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 발은 아직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 고통을 참고도 매일을 걸었는데 이제 걷지 않아도 된다니..

걷지 않는 아침이 오기 전에는 실감나지 않을 것 같다. 







항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해변가의 레스토랑 2층 테라스에 앉아 펠레그리노 메뉴를 먹었다. 


이 곳은 순례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길의 끝 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관광객에게도 큰 볼거리가 있는 관광지였다. 

관광지에서 먹는 펠레그리노 메뉴는 생소했다. 맛도 별로였지만 수다스런 관광객들로 둘러쌓여 먹는 기분이 더 별로였던 것 같다. 


저녁을 먹는동안 어느덧 밤이 되었다. 마르셀이 있나 싶어 행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마르셀은 커녕 익숙한 얼굴 하나 찾지 못했다. 어쩐지 공허함이 계속 밀려왔다. 








깜깜해진 항구를 조금 걷다가 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다리도 아팠고 걸을 힘도 없었다. 

알수없는 공허함에 아틸라와 나는 둘 다 힘들어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공허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끝은 아니야. 우리는 피에네스떼레도 안갔고 크레덴셜도 안받았어. 내일 진짜 끝을 내자!"


"응. 내일 라이트하우스 가서 이 양말을 태울거야. 그러면 끝이 난게 실감이 나겠지. 넌 뭘 태울거야? "


"나? 음..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태울게 없다. 아 ! 내 스틱을 태울래. 한국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아서, 

이걸 내 손때문에 갈라진 이 부분만 잘라서 내가 갖고 나머지는 태울래." 



내일을 이야기 하다보니 기분이 좀 괜찮아진다. 오늘도 그가 함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의 이 공허함은 끝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게 아닌가 싶다. 

산티아고에서는 그래도 피에네스떼레가 있다는 위로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정말 다음이 없다. 


다음을 애써 회피해가며 순간 순간을 살던 우리에게 갑자기 다음을 생각해야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고,

그 순간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리. 


꿈결같은 시간속에 살던 우리에게 꿈에서 깨야할 시간은 너무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멈춰있는 시간은 없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에 적당히 몸을 내맡기고 그 안에서 최선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게 인생이고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우리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게끔 만들어 진 존재들이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각각의 선택들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과거가 있고, 그렇게 살아갈 미래가 있다. 



한국에 두고 온 내 삶을 생각해본다. 나의 과거들, 그리고 까마득한 나의 미래들. 



두렵다.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가.

두렵다. 보고 듣고 느낀 그 수많은 것들을 나중에는 다 잊어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이 모든 것을 모른체하고 다시 예전과 같이 살게 될까봐. 




 그리고




힘들게 만난 이 소중한 사랑을 다시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