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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피스테라 가는 길 D+36. sunbow



2011년 9월 26일.   


Negreira    >   Olveiroa   |   33 Km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다. 3일만에 피에네스떼레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30키로씩 걸어야 했다. 

4일에 나눠서 걷기는 짧은 애매한 곳에 피에네스떼레가 있었고, 우리는 3일만에 가기로 결심했 던 것이었다. 






피에네스떼레로 가는 길, 피스테라 라는 스페인의 끝 항구 마을에서의 끝을 피에네스떼레라 부른다고 했다.

예전에 나보다 앞서 산티아고를 걸은 선배에게서 피에네스떼레에서 쓴 엽서를 받았었다. 

그 때의 그 감동이란.. 산티아고가 그리도 궁금했던 것 처럼 피에네스떼레도 몹시 궁금하다. 


모든 이들이 얘기하는 그 감동을 나도 느낄 수 있을까 ?. 



바닷가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침내내 안개가 자욱했다. 







나헤이라에서 다음 마을까지는 9km, 그 곳까지는 쭉 산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9km면 아침에 한번에 걷기엔 괜찮은 거리다. 길이 평지였을 때 말이다. 


좁은 산길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아스팔트로 연결되었고, 

또 다른 작은 산길을 한번 만나고 아스팔트를 한번 더 만났을 때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바 하나가 전부인 조그만 마을이었다. 이미 몇몇 순례자가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바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 먹었다. 


내 팔뚝만한 샌드위치, 예전에는 이리 큰 걸 어떻게 혼자 한번에 다 먹나 했는데

이젠 곧잘 먹는다. 그 커다란 샌드위치는 먹으면 금새 배가 고파지고 만다.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아틸라는 나의 먹성에 늘 놀라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 먹어야 겠는걸.. 



바 앞에 이동식 슈퍼마켓 차가 나타났다. 이 마을을 지나고 나면 앞으로 3km앞에 마을이 하나 있고, 

그 뒤로는  20km 까지 바도, 레스토랑도 만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어제가 일요일이어서 비상 식량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때마침 나타나 준 수퍼마켓 차에서 

초코쿠키 참치빵, 그냥 빵, 그리고 배 두개를 샀다. 오늘 하루종일 먹을 양식이었다.  







산 속 깊은곳에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는 이동식 슈퍼마켓, 아이디어가 참 좋은 것 같았다. 

저 차에는 과일부터 고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신기한 수퍼마켓이다. 




우리는 길을 계속 걸었다. 길은 계속 아스팔트로 이어지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피에네스떼레까지 가는 길은 아스팔트가 많고 경사가 심해 힘들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시간여를 더 걸어 나온 마을 끄트머리의 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쥬스를 한잔 마셨다.

앞으로는 바가 없을테니 바가 있을 때 쉬어가자는 생각에서 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인상좋은 흰머리의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오며가며 몇번 마주쳤던 것 같다. 폴란드에서 온 그녀는 이번이 3번째 산티아고행이라고 했다. 

얼굴에 평화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해보이는 그녀는 자기가 걸을 수 있을때 까지는 이 길을 계속 걸을 것이라 말했다. 








이 길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이 길은 정말 소중한 곳이었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꼭 나중에 혼자서, 부모님과 함께, 자식들과 함께 다시 이 길을 걷겠노라 다짐해본다. 









길은  계속 아스팔트로 이어졌다. 아스팔트 옆으로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플립플랍으로 갈아신었다. 긴 시간을 나와 함께한 까만 플립플랍, 많이 너덜너덜해 졌다. 

조만간 떨어지고 말 것 같아 예비용 플립플랍도 사 두었지만, 한국에서부터 가져 온 

만원짜리 플립플랍이 꽤나 잘 버텨준다. 이 길의 끝까지 녀석과 함께하기를 기대해본다. 















길은 지루했다. 아틸라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젖소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혼자 헛소리도 해 가면서 길을 걸었다. 

아스팔트위를 걷는 것은 숲속이나 드넓은 평원을 걷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이미 지칠만큼 지쳐있는 내 다리가 뻗뻗해져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스팔트가 내 다리를 뻗뻗하게 만든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다리의 피로도가 훨씬 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초원과 젖소들이 있는 아스팔트 길 위를 터벅터벅 걷다보니 

이렇게 걷는 것도 이제 내일이면 끝이구나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발소리와 지팡이소리만 가득한 이 아스팔트 길, 다시 지나쳐 가지 않을 이 길위의 나의 걸음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본다. 나의 템포와 나의 걸음. 



"피에네스떼레로 가는 마지막 날, 이렇게 900km를 걸었다. "



내 삶에 단 한번 뿐인 이 순간을 기록해둔다. 






한 마을을 지나 아스팔트는 드디어 흙 길로 이어졌다. 

길게 뻗어있는 노란 흙 길, 그리고 그 길가의 한쪽 귀퉁이에 아틸라가 앉아 있었다. 



"Hola"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전에 샀던 빵을 조금 먹었다. 

아틸라가 듣고있던 노래를 나에게 들려준다. 간만에 꽂은 이어폰의 감촉이 낯설다. 


그가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에 듣고 반한 노래라고 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노래였다. 


I'm free, come with me. 라고 속삭이는 가수의 목소리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Thievery corporation의 Free 라는 곡이었다. 좋다. 

나란히 앉아 그 노래를 계속 반복해가며 들었다. 그 몽환적인 멜로디는 다리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음악의 힘, 처음으로 이어폰을 두고 이 길에 온 것을 후회했다. 





[ free, Thievery corporation






우리가 앉은 맞은 편 길 귀퉁이에도 왠 남녀 순례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우리는 각각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 커플은 2년전 피에네스떼레에서 우연히 만났고, 지금은 스페인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인인 남자는 길 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노란 산티아고 안내서의 저자라고 했다. 

책의 업데이트를 위해 주기적으로 그는 산티아고를 걷고있었다.


내가 떠나올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노란책이 없었지만, 

이 길위에서 만난 사람의 절반 이상은 그가 쓴 노란책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그의 노란 산티아고 안내서가 출간되었다.) 

그 책의 저자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는 금새 일어섰다. 우리도 곧 그들을 따라 일어선다. 


이 길위에서 이루어진 수 많은 커플들, 그 행복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행복해진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토록 찾아 헤메도 만나지지 않던 나의 인연이 이 낯선 곳에서 만나지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 마음만 놓고 봤을때 뭔가가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이 곳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더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원하는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길 이니 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온 이 곳에서 나와 너무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 사랑이 이루어지던 이루어 지지 않던간에 이 길이 사랑으로 충만한 것은 사실이지 싶다. 






앞서가던 아틸라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하늘을 가리킨다. 

강렬한 태양에 나는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고, 아틸라는 나에게 선글라스를 벗어서 준다. 



"Oh my god !! It's so beautiful!" 



동그란 무지개가 태양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이런 무지개는 난생 처음이었다. 



"와~ 나 이런거 태어나서 처음봐. 둥근 무지개라니! 상상도 못했어!"


"나도 깜짝 놀랬어, 너무 아름답다. !" 







태양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무지개. 정말 신비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둘이서 멈춰서서 무지개를 바라보고, 지나가는 몇몇 순례자들에게도 알려주었다. 모두가 감탄했다.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보고, 조금가다 다시보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무지개는 사라져있었다. 


잠깐 동안의 기적,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 볼 생각을 한 사람에게만 보였을 행운. 

이 놀라운 무지개를 찾아 내고 함께 볼 수 있게 해 준 아틸라가 참 고마웠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저 길을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노란책의 저자 아저씨가 저 언덕을 넘으면 정말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해준다. 



"그라시아스." 



힘든건 어차피 모두가 매한가지다.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해가며 순례자들은 오늘도 한발짝씩 내딛는다. 








정말로 저 멀리 호수가 보였다. 정말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다들 호수를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까 만난 폴란드 할머니 두분도, 노란책 저자 커플도, 그리고 처음보는 젊은 순례자 서너명도 함께였다. 


다리가 너무 아파왔다. 간만에 너무 길게 걸으려니 다리가 지쳐버린 것 같았다. 

통나무처럼 뻗뻗해진 다리로 걷다보니 나는 자꾸만 뒤쳐지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우리는 다같이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뒤따라 걷기에 바빴고, 그들은 잠시 쉬다가 내가 오면 다시 걸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전혀 쉬지 못한 나는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고, 

내가 멈춰 쉴 수 없게 그들과 함께 걷고있는 아틸라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걷는다고 했지만 속도가 자꾸만 늦어졌다. 

산길이라 플립플랍을 신을 수 없었고, 내 발은 갑갑한 신발속에서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산길, 저 옆에 있는 돌바위가 어쩌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난 더 걸을 수 없었다. 거의 3시간을 나는 쉼없이 걸어 온 셈이었다. 다들 어쩜 저리 잘 걷나 모르겠다. 


더이상 걸을 수 없을것만 같은 기분으로 한발짝씩 옮기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완전히 낯선 곳에 완전히 혼자 동떨어진 낯선 기분이 가득했다. 



'이대로 혼자가 되 버리면 어쩌지?'

'아틸라가 나를 두고 저 사람들이랑 가버리면 어쩌지?'

'저 멀리 갔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별의 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림같은 하늘도, 아름다운 풍경도, 혼자 남겨진 두려움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내가 혼자 쉬고 있는 이 회색빛의 낯선 길을 얼른 벗어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쉴 수 없었다. 낯선 두려움이었다. 빨리 아틸라를 만나고 싶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잿빛 돌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리가 빨리 움직여주진 않았다. 그저 지금껏 그랬던 것 처럼, 고통속에 한발짝 한발짝 내딛을 뿐이었다. 

돌산을 돌아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내리막의 끝에 아틸라가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는 나를 꽤나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 길 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내가 오는 것을 본 아틸라가 역시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난 정말 쉬고싶은데 그는 또 다시 걸으려나 보다. 


"아틸라, 근데 나 진짜 힘든데 좀 쉬어가면 안될까?"

"응 쉬어가자. 근데 여긴 햇볕이라 별로야. 니가 안올것만 같아서 길이 잘 보이는 저기에 있었던거야."

"아 정말? 내가 안오긴 왜 안와. 니가 여깄는데."


말없이 내 머리에 키스를 하는 아틸라다. 그의 존재가 또 다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내가 이토록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길 가에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개울은 저 멀리서 흐르고 있어 그럴 순 없었다. 

늘 우리가 먹던 초코쿠키를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랜다. 


"이건 진짜 말도 안되. 내가 가면 다시 걷고, 내가 가면 다시 걷고..

나는 거의 쉬지도 못하고 세시간을 걸었어 ! " 


"아, 그랬겠구나. 그치만 넌 정말 튼튼한걸? 세시간을 어떻게 안쉬고 이렇게 걸어?"


"그러게. 근데 진짜 더는 못걸을것 같았는데 내가 계속 걷고있더라. 신기했어." 


투정한번 부려 보려고 했는데 그냥 웃고 만다. 

그간 우리가 너무 조금씩 걸어서 그런가 보다고 얘기하며, 아틸라가 알려준 헝가리안 욕을 나란히 해 가며 웃는다. 


누굴 욕하겠는가 ? 내 선택이 그랬을 뿐인 것을 말이다. 


Shit, basszameg. ! 



다시 플립플랍으로 갈아신었다. 발가락부터 다리 전체가 고통스럽지만 걸어야만 한다. 

아틸라가 나의 보폭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준다. 



"뚜루루 뚜두 뚜루루루루 ~~ Don't worry, be happy ~ " 



그렇게 돈 워리 비 해피를 함께 불러가며 우리는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삼십분쯤 더 걸어 마을이 나왔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곳에서 3km를 더 가야 했지만 

우리는 이 곳에서 쉬어가기로 결심했다. 


입구에 있는 바로 들어서니 우리가 아까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쉬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다음 마을까지 갈 것이라는 우리에게 힘을 내라 말해준다. 


우리는 클라라 두잔을 시켜서 오전에 산 참치빵과 함께 먹었다. 



"너 그거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먹었었어."



파라다이스를 지나 행복으로 가득한 상태로 내려온 마을에서 우리는 클라라와 참치빵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 한잔의 맥주 덕분에 남은 6km를 정말 힘들게 걸었었다. 



"오늘은 3km 남았으니까 그때보다 훨신 수월할거야!" 


"나도 그러길 빌어. :) "



그와 함께 걸은지 벌써15일째였다. 우리는 하루 하루 되짚어가며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작 일주일쯤 같이 걸은 기분인데 벌써 2주가 넘게 함께했다니..

거의 매일, 하루에 16시간 쯤은 얼굴을 마주보고 지낸 것 같은데 이렇게 지겹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침 눈 뜰때부터 밤이되어 잠들기 전 까지, 각각 걷는 시간을 빼고는 함께 먹고 함께 쉬어왔다. 

2주가 넘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지만 아직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새롭기만 하다. 



"Thanks for everything."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Olveiroa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를 지나 우리는 시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조금 낡고 허름해 보이는 알베르게였다. 다행히 우리를 위한 침대가 있었고, 아틸라와 나는 나란히 이층 침대를 쓰게 되었다. 


조금전에 참치빵을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았던 우리는 입구에 있던 수퍼마켓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기로 했다. 


내일 먹을 빵을 사고 약간의 빵과 문어 통조림,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제 만났던 헝가리안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또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그들이 알고있는 한국인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줬다. 아무래도 포토마린에서 만났던 그 약사오빠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국인과 헝가리인, 뭔가 성향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 했다. 늘 침략당하면서 살아온 역사가 비슷해서 그런가 ? 


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또다시 진지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낯선 언어를 듣고 있는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나름 무슨 얘기를 할까 추측해가며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해본다. 


얼굴이 진짜 심각하다. 뭐 얼마나 심각한 일이 있나 싶어 차마 껴들지는 못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과 함께 다닌다는 헝가리안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고, 심각한 얼굴은 한명이 더 늘었다. 


너무도 심각해 보이는 네명의 헝가리안을 바라보며, 이것이 헝가리안의 특징이구나.. 하고 단정지어버리는 나였다. 


돌아오는 길에 얘기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 할아버지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럴거면 그냥 따로 다니면 되지.. 그러기엔 영어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너무 신경쓰인단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긴 길을 함께 걸어 온 그들이 대단한 것 같다. 


그들의 행운을 빌어주며 우리는 우리 숙소로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잠을 자고 있었다. 



"지니, 우리 잠깐 나가서 바람좀 쐬자. "


"응 그래."



어둡고 조용한 방을 나와 알베르게 뒷 편 정원으로 나갔다. 별들만 반짝이는 까만 밤이다.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을 했다. 시원한 바람에 다리의 열기가 조금 식는 것 같다. 



아틸라가 나를 바라본다. 까만 밤하늘의 별처럼 그의 눈이 반짝인다. 

나도 그를 바라본다. 낮에 만난 동그란 무지개가 떠오른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일이면 우리는 피에네스떼레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900km, 그 긴 길을 걷고야 만 것이다. 



"thanks for today, and I like you more than yesterday."



하마터먼 내가 먼저 그에게 키스할뻔했다. 그는 그저 나를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고는 안으로 들어가자 말했다. 

그도 나처럼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 싶다. 몇일 안남은 그의 출국,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계속 떠오르는 이별의 순간. 


그저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좁다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살짝 고개를 돌려 아틸라를 바라본다. 

어두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 순례자의 코고는 소리에 아틸라의 숨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앵~ 하는 모기 소리가 갑자기 내 귓가에 들려왔다. 갑자기 온몸이 다시 가려운 기분이다. 

배드버그가 내 몸을 타고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끔찍하다. 


배드버그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듯 하다. 


배그버그에 물려 괴로웠던 시간들, 아틸라와 함께 이겨낸 고통의 순간들,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너무도 피곤했던 오늘의 나는 금새 곯아떨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