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1. 피레네 산맥을 오르다.



2011년 8월 22일

St Jean-Pied-do-port   >  Orisson  | 8Km 
 

아침 일찍 보르도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바욘으로 나섰다.

그렇게 고대하던 산티아고를 향한 첫 걸음,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밤새 뒤척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7시 기차에 올랐다.


몽롱한 상태로 아침기차에 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어쩌다 지금 내가 이 기차에 몸을 싣고 있는 걸까? 

사실 나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유럽을 방랑중이었고, 구입한 유레일 패스도 일주일의 기간이 남아있었다.
유레일 패스가 끝이날때 즈음, 산티아고를 시작해야지 라는 어렴풋한 마음만 먹은 채 돌아다니다 문득 
산티아고를 지금 가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머물고 있던 프랑스 니스에서 산티아고를 가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니, 
프랑스 보르도 > 바욘 > 생장 피드포르로 시작하는 방법 밖에 없었고, 내친김에 보르도행 기차표를 알아보러 역으로 갔다. 


하지만 8월 말의 토요일, 막바지 휴가철을 즐기러 각지에서 몰린 관광객들로 기차는 커녕 니스에서 하룻밤을 더 머물 숙소도 구할 수 없었다. 또 낯선곳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더 보내고 싶지 않아 기차역으로 다시 향했고, 기적적으로 매진이었던 보르도행 기차표를 구하게 되었다. 급히 보르도에 있는 호텔방을 겨우 예약하고, 야간기차에 몸을 싣고 보르도에 도착 한 것이 바로 어제이다. 


 모든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그저 일어났다. 당혹스러웠지만 어쩐지 하늘이 날 도와준 듯한 기분이 든다. 

어찌됐건 지금 나는 그렇게 꿈꾸던 산티아고를 향해 가고 있다.



바욘역에서 두시간의 대기, 그리고 생장피드포르로 가는 작은 기차에 올라탔다.






두칸짜리의 아담한 기차에는 나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딱 바라보기만 해도 그런 사람들은 티가 났다. 가벼운 옷차림, 커다란 배낭, 그리고 따뜻한 눈빛들. 
서로를 알아보는 건지 그런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게 된다.
각자 혼자 왔지만 이 기차에서부터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이 들었다.  

'저 사람도 순례자일까 ? '
저 쪽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일본인 세명, 그리고 인상좋은 유러피안 할아버지 할머니들. 
쑥스러워 먼저 말도 걸어보지 못했지만, 같은 길을 걷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차가 다닐 수 없을 것만 같이 깊은 산길을 두어시간 달린 뒤, 수 년간 머릿속에 되뇌이며 꿈꿔왔던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했다.

아주 조그만 시골역.. 조금은 허무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 작은 역이 생장피드포르란 말이야 ?







또다시 낯선 동네에 혼자 내려섰다. 나는 이 곳에서 순례자의 길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슬며시 두려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 내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조그만 역에서 내렸고, 어디론가 향했다.
무작정 사람들을 따라 걸어가본다. 


생장피드포르는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역에서 나와 왼쪽길로 쭉 올라가 길을 건너고 계단을 올라 또 다시 왼쪽으로 들어서면 39번지에 순례자 사무실이 있다.

역시 내 생각과는 또 다른 공간이다.






어찌된 일인지 순례자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 문 앞에는 몇몇의 순례자가 앉아 있었고,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근처 상점으로 들어가 순례자 사무실이 어디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아 ~ 점심시간이에요. 한시가 되면 문이 열릴거에요. " 


배낭을 내려놓고 근처에 앉아 가져온 산티아고 안내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다. 동양인은 더더욱 없다. 

아까 기차에서 본 듯한 젊은 일본인 두명이 올라왔다. 나는 그들이 일본인인걸 알기에 말을 걸진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리는 내 또래의 남자도 한명 있었다. 어쩌면 태국에서 왔을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하며, 지나가는 사람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순례자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 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무척이나 친절했다.
매일같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순례자들에 지쳤을 법도 한데 모두를 밝고 기운찬 미소로 맞아준다.

그리고 태국인일거라 생각했던 그 남자 순례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진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래도 한국인을 만나게 되어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적어도 혼자는 아니니까. 
진과 함께 크레덴셜을 발급받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가비를 얻었다.  
조가비를 가방에 달고나니, 얼른 길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미 오후 2시인 탓에 멀리 가지 않고 첫번째 알베르게인 Orisson 까지만 가기로 하고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8Km, 어느 정돈지 감이 안오지만 그정도는 거뜬하겠지라는 자만감으로 말이다. 




우체국에 들러 2kg의 짐을 산티아고로 먼저 보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산티아고 우체국에서는 짐을 25일 동안만 보관해준다고 한다. 40일만에 찾으러 간 나에게 가벼운 면박만 준 걸보면,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꽤 많은듯하다.

10kg가 조금 넘던 내 가방은 9kg으로 줄었고, 내 어깨는 잠시 동안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 9kg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하는데에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내 생전 그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렇게 오래 걸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피레네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살 어린 진은 아직 대학생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떠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보르도에서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고 한다. 어쩌면 일요일에 보르도에서 만났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인연이라는 것은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조롭게 시작한 경삿길이 점점 가팔라 진다.


 




듣던대로 피레네 산맥은 그림같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딜 쳐다봐도 그냥 그림이었다.

한 폭의 그림 속을 거니는 기분. 하지만 태양은 너무 뜨겁고 경사는 가팔랐다.
게다가 목축 우선지대인 탓에 길에는 짐승의 분비물이 널려있어 걷는데 꽤나 신경을 써야 했다.

잠시 멈추어 돌아보고 감탄하고, 또 다시 땅만 바라보면서 힘들게 산을 오르고,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잠시 멈춰 감탄하고, 또 다시 땀흘리며 힘들게 산을 오른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지옥을 걷는 기분. 도사 전우치가 걸닐었던 아름다운 화폭 속 산길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평소에 산행을 좋아하고 걷기도 좋아했지만, 9kg짜리 배낭을 메고 해발고도 700m까지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준비한 물은 떨어진지 오래다. 목이 말라 초콜렛도 먹을 수 없다.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해내고 민간인으로 복귀한 진 에게도 쉬운 길이 아니라는데, 나에게 쉬울리가 없지 !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은 알베르게와, 식을줄 모르는 태양의 열기아래 지쳐 

자포자기 심정으로 지나가는 차를 세워 알베르게에 대해 물어봤다.

"Over there ~ !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 3시간 30분의 등산끝에 Orisson에 도착했다.








2004년에 신설된 깨끗한 알베르게였다. 처음으로 겪는 알베르게 치고는 너무 깨끗하고 좋은 시설이었다.
물론 가격도 30유로로 꽤 비쌌다. 그 당시에는 그게 비싸다는걸 몰랐지만 말이다.

깨끗하게 씻고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식당에는 이미 다른 순례자들이 앉아서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명의 낯선 사람들, 하지만 나와 같은 길을 걸어 갈 나와 같은 순례자들이다.


처음은 무엇이든 힘들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진이 함께 있었다는 것..
처음으로 맞는 알베르게에서의 저녁은 낯설고 신선했으며, 두렵고 흥미로웠다.






30명 남짓의 순례자들.. 대부분 나이가 많아 보인다.
호스피탈레로의 안내에 따라 각자 자기 소개를 하고,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파리지엥 페르난도 아저씨, 이번은 그의 16번째 카미노였다.
카미노에서 여러나라 사람들을 만났고 한국인 친구도 여럿 알고 있다며 간단한 한국말을 나에게 건넨다.
뚱뚱한 대머리 파리지엥, 16번 이나 카미노를 걸어도 살이 안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친절한 순례자이다. 


"한국에서 왔어요 ?"


살짝 어눌한 한국말로 말을 걸어 온 히데오상. 한국에서 14년동안 근무한 일본인 히데오상은 한국어 실력이 유창했다.
 한국을 몹시도 사랑하는 그는 저녁시간 내내 우리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역사, 경제,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진과 코드가 잘 맞아서 둘이서 도란도란 두 나라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해 토론을 했고 나는 살짝 피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이 날에는 미처 몰랐지만, 히데오상은 나의 가장 소중한 카미노 친구 중 한명이 되었다. 

식사를 하던 중 종업원이 쪽지를 한 줄에 하나씩 나눠주면서 무어라 말을 한다. 
프랑스어로 말을 했고, 페르난도가 우리에게 영어로 번역을 해 주었다. 그 날은 오리진 알베르게의 주인인 호스피탈레로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깜짝 파티를 준비해주려고 하니 다같이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Why not? 모두가 그 서프라이즈 파티에 즐거워했고, 우리는 쉬쉬하며 몰래 낯설은 이름을 외웠다.

"수리아나 수리 ~ 수리아나 수리 ~ "

정체불명의 언어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감동받은 호스피탈레로가 제공한 축하 샴페인을 다같이 나눠 마셨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하나였고 모두 즐거웠다. 서로 의사 소통은 힘들었지만 따뜻한 눈빛과 미소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고, 그 따스함과 여유 속에서 서로의 행복을 나눠갖는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나의 기대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했던 첫날.


그렇게 와인과 샴페인을 듬뿍 마시고 행복과 기대로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