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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2011

산티아고 가는 길 D+2. 빵이 뭐길래





2011년 8월 23일 


Orisson  Roncesvalles| 19Km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서의 첫번째 취침..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꽤나 설쳤고, 
새벽부터 부스럭 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원래 잠귀가 밝은 편이라 앞으로도 잠을 자기가 꽤나 힘든 나날이 이어지겠구나... 어렴풋이 생각하며, 
그래도 첫날의 걷기에 대한 희망과 설렘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섯시, 해발고도 750m 지점인 밖은 아직도 어두웠고, 안개가 자욱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다시 차곡 차곡 채워 넣은 다음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간단한 빵과 버터, 그리고 커피.

한달정도 유럽을 돌아다닌 나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아침식사였다.

아침을 먹다 보니, 나와 같은 침대 아랫칸에서 잠을 잔 미국인 아주머니가 빵을 휴지에 싸고 있었다.
바구니에 담겨져 올려져 있던 빵은 넉넉치 않아 보였지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국적불문하고 아줌마는 강하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옆에 앉아 있던 독일인 모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카미노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독일에서 온 헬레나와 바바라, 그녀는 공무원이었고 13살짜리 딸의 방학을 맞이하여 함께 카미노에 왔다고 한다. 
아직 어린 바바라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질문을 하면 수줍게 웃고는 엄마에게 독일어로 말을 하고, 헬레나가 우리에게 다시 영어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힘든 대화였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우리는 의사소통을 해 가며 아침의 여유를 만끽한다. 



 


그때 갑자기 호스피탈레로가 버럭 화를 내는게 아닌가? 

빵을 휴지에 싸서 나가려던 그 미국인 아주머니를 발견한 호스피탈레로가 아주머니에게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당황한 아주머니는 미안하다고 얘기를 했고, 그래도 계속해서 화를 내는 호스피탈레로에게 그렇다면 돈을 내겠다고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안좋은일이 있었는지 호스피탈레로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계속 냈고, 
급기야는 아주머니의 어깨를 끌어다가 강제로 의자에 앉히고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빵을 다 먹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미국인 아주머니는 동전을 쥔 손을 벌벌 떨어대며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사태로 인해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고,
보다못한 사람들이 호스피탈레로를 데리고 나가고, 우리가 아주머니를 데리고 나오면서 상황은 일단 종료되었다. 


첫날 아침부터.... 좋은 경험을 했다.


물론 모두가 함께 먹어야 할 빵을 싸간 아주머니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그렇게까지 화를 내서 사람을 무안하게 해야 했을까 ?
이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만 상처를 입힌것이 아니다. 

지리적인 특성상 그 날 그 곳에 있던 30명의 사람들의 카미노에서 맞는 첫번째 아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 호스피탈레로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이런 불쾌감을 줘야만 했을까? 그것도 어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고 이름을 외워 노래까지 불러준 우리들에게 말이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아주머니가 참 안됐었고, 얼른 마음이 진정되기를 진심으로 빌어 드렸다. 내가 그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다면, 그 날 하루를 온통 망쳐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뒤부터, 나는 조식따위 몰래 챙기지 않게 되었다. 


첫날부터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준 고마운(?) 알베르게를 뒤로 하고, 안개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미터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안개 속에는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내 숨소리 그리고 내 발자국 소리만이 존재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아무도 없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다는 게 맞는 듯 하다.
뿌옇게 피어올라 있는 안개는 나의 시야를 정말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소들, 양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어쩐지 혼자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순하디 순한 그들이 두렵기도 했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는 세계에 혼자 떨어진 기분 ? 너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야? 라고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떼로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내 숨소리와 방울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발짝 한발짝 걷는다. 꽤나 가파른 길이지만 아침의 선선하고 상쾌한 공기와 쉴새없이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주는 에너지로 신나게 걸을 수 있었다. 

양들이 쳐다보는 길 옆 으슥한 곳에서 처음으로 볼일(?)까지 살짝 보고 나니, 
뭔가 정말 자연속에 있는 듯한 기분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는 순례자니까 괜찮아 ! 









산 속에 누가 이렇게 표시를 해 놨을까 ?

돌 위에, 나무위에, 때론 표지판에 있는 노란색 표시를 찾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표지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다 보면 길 위의 작은 돌멩이 하나, 작은 리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흙길 속에 파뭍힌 돌멩이 위에 그려진 표시를 찾았을때는 어쩐지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걷는 재미도, 표시 찾는 재미도, 육체의 피로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과 점점 내 어깨를 내리 누르는 배낭의 무게 때문에 휴식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자꾸만 뒤에서 쫒아와 날 지나쳐 가는 다른 순례자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얼른 따라 가야만 할 것 같아 부지런히 걸었다. 

안개는 점점 걷히기 시작하고, 정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발고도 약 1400m, 구름을 내려다 보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햄과 치즈를 함께 넣은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뜯어보니 치즈만 들어 있었다...
같이 주문한 진의 샌드위치에는 아마도 햄만 들어 있으리..... 정말 고대하던 점심시간이었는데, 정말 나는 몹시 상심했다...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유독 치즈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나에게 치즈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샌드위치는 끼니가 될 수 없었다.

 왠지 배고파 보이는 근처에 있던 일본인에게 샌드위치를 건네 주고는, 그가 준 초콜렛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치즈먹는 연습을 꼭 많이 해서 치즈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리라고 다짐을 하며,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초콜렛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정상을 지나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졌다.
무거운 베낭을 매고 걷는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 훨씬 힘들었다.






한국의 숲과 비슷한, 어쩐지 삼림욕장 같은 분위기의 숲을 그래도 꽤나 즐겁게 걸었다. 

다리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걷는 것이 좋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봉쥬르 하고 인사 하는 것이 재밌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어디가 국경인지도 모른채 어느새 스페인 땅을 걷고 있었다. 

여기가 스페인인지, 한국인지, 프랑슨지 알수 없는, 그저 아름다운 산이었을 뿐이다. 










처음으로 19km가 되는 길을 걷고나니, 다리가 꽤나 아팠다. 
아직 내가 얼만큼 걸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걷기를 여덟여시간?

마침내 이름도 어려운 론세스바이어스(Roncesvalles)에 도착했다. 
스페인은 ll 을 ㅇ로 발음을 하는데, 그것에 익숙치 않은 나는 이 지명을 이야기 하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이 걸렸다. 

론세스바이어스의 알베르게는 몇백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만큼 거대했다. 
넓은 강당에 수백개의 이층침대를 가져다 놓았고, 새로 리모델링 하여 내부 시설은 깨끗했다. 







씻고 짐까지 풀고 나도 할일이 없었다... 저녁 때 까지 무엇을 해야할까 ?
고민을 하던 중 알베르게 한쪽 구석에 있는 도서관에서 한국인이 버리고 간 듯한 한국어로 된 책을 발견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

읽기 싫게 생긴 책이지만, 정말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듯한 책..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낯선 곳 낯선 방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었다. 
한국가면 꼭 사서 다시 보리라 다짐을 하며, 구구절절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어 내려감을 안타까워 하며,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산 정상에서 만났던 일본인 친구와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햇반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숙소 앞 성당에서 열리는 저녁미사에 참석했으며, 
어제 숙소에서 만난 일본인 아저씨와 독일인 모녀와 함께 티타임도 가졌다. 


그렇게 나의 두번째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엄청나게 많은 순례자들을 보며 
카미노가 내가 생각했던 그런 한적한 길이 아닐 수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도 제각각인 모든 사람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을 보고 
카미노라는 그 특별한 장소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 가고 있었다. 

히데오, 켄따루, 후미야, 바바라, 헬레나, 페르난도..


첫날 부터 알게 된 많은 사람들, 

이름을 외우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겠다고 생각하고
앙드레 지드의 아름다운 문장을 되뇌이면서,

그렇게 수백명 순례자들의 숨소리 속에 내 숨소리도 녹아들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