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닌 걸 맞다고 할 재주와 틀린걸 옳다고 할 재주가 내겐 없다.
틀렸다는 걸 알게되기 전 까지의 행동들은 결코 그것에 대해 알게 되고 난 이후의 행동들과 같아질 수 없다.
어쩌면 그러한 앎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편견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아직 내게 어떤 앎은 그릇됨이다.
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부정했고, 또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기대했다.
살아가다보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지만 그것을 믿고싶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애써 아니라고, 또 아닐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타인을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우리는 아무리 애써봐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살아가고 있다.
때론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지만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고선 곱씹어 후회하는 일도 생긴다.
일어난 일은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 않고, 해선 안되는 일은 해도 괜찮은 일이 되진 않는다.
모든것에 대한 기준이나 잣대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에 어쩌면 이 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사는 나의 세상에서는 그런 나를 스스로 용납하기가 어렵다.
물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그릇된 행동이 불러온 타인의 변화 앞에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손쓸 수 없는 그 상황에 발만 구를 뿐이다.
분명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제는 결코 오늘같지 않고, 내일도 결코 오늘 같을 수 없다.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2.
어떤 엄청난 것을 바라고 기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내 마음은 엄청난 욕심에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게 되기도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살아가다보면 스스로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되는데, 요즘 내가 나에게서 느끼는 변화는 그런 것이다.
욕심을 없애진 못했지만 욕심내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변화. 이런 변화는 마음에 든다.
내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잘 없는데,(사실 그들이 내 욕심을 알아서 그런건지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걸로 니가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던가 "이런 걸로 니가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략 난감한 멘탈상태가 되는 요즘이다.
사실 예의상 하는 조사격의 문장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간혹 내가 이런걸로 불평을 했던 적이 있던가?
내가 이런걸 불만족하곤 했었던가? 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행여 저렇게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굉장히 이상한 자기반성 아닌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데, 이 자기 반성에 대한 끝은 여전히 애매모호할 뿐이다.
(이러고 있는 나를 보니 정말 세상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사는구나 싶다)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팩트는 이러하다.
"니가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1. 이건 니가 충분히 불편해 할 만한 일이야. 2. 그렇지만 이건 니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야.
로 자연히 사고의 전환이 되는 이 상황에서 난 그 일에 대해 전혀 불편하지 않고 이미 받아 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야. 나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그리고 다 이해한지가 언젠데. 난 정말 괜찮아. "
라는 대답을 이미 여러번 한 상태일 때, 저런 이야기를 또 꺼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에 아직 그 것이 불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어떤 행동들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해 보이게끔 한 것인지 모르겠다.
난 대체 왜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사실 이런 생각들은 사건이 있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하다 보면 들게 되는데,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내 마음은 반대로 굉장히 심플해지고 대답은 간결해지고 있었다.
모든 사건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랬을 경우 저랬을 경우 따지다가 지쳐 나가떨어져 버린 지금의 나는
그저 맞아. 아니야. 좋아. 싫어. 를 기본 베이스로 의사 결정을 하고 나의 의견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의사인지 너의 의사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는 또 명확하게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여 나의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힘들게 전하는 나의 진심을 왜곡하지 않은 상태로 상대방이 받아들여 줄 수 있는걸까?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누구도 의심없이 이해하지 않는다.
왜곡하고 곡해하고.. 그렇게 너무도 쉽게 오해들이 쌓여가는 세상이 참 안타깝다.
그렇지만 적어도 난 진실되게 살아가야겠다 생각해본다. 비록 모두가 날 오해할지라도.
3.
꾸밈없는 솔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쿨한척 애쓰지 않고, 내가 느끼는 그대로 세상에 얘기하며 그렇게 솔직하게 살고싶다.
쿨몽둥이로 백번은 두드려 맞았어야 정신을 차렸을 것 같은 예전의 내가 남겨둔 기억들이 때론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서른이 되 지금의 나는 그냥 나 다운 모습, 그저 나인 모습으로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싶다.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왔던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던 어떤 것들과 내가 믿었던 나의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꼭꼭 숨겨놓기만 했던 것 같다.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들어간 누에고치같은 나의 틀 속에서도 나는 나름 잘 살아왔었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세상 모든것을 안다 얘기하고 다녔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다. 나를 가장 괴롭힌건 나 자신이었다.
엄격의 반대가 방종은 아님을 몰랐던 나는 잠깐동안 그릇된 방식으로 나 스스로를 방종했다.
짧았던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조금 괴롭게 하고 있다. 물론 그로부터 얻게 된 어떤 가르침들도 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종하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쓰니 굉장히 거창해보이는데 사실 별건 아니다.)
꾸밈없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진실로 드러난 상대방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보고 싶다.
너무 애쓰지 않고 솔직하게, 하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깊은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스스로에게 먼저 솔직해 져야하고, 그런 솔직한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나의 솔직함에 도망가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어쩔수 없다. 솔직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나 역시 받아들일 순 없으니.
솔직하려 애쓰는 내 모습에 스스로가 또 놀라고 두려워 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잘 꺼내놓고 있을 것이다.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꼭꼭 숨어 있었던 것은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서 시작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받지 못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의 양이 너무 컸던 탓이리라.
이젠 그저 한사람에게만 사랑받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이렇게 봄이 오려나보다.
[ 서로 다른방식으로 사랑을 정의했던 세 여자의 삶. 그리고 나의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