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언젠가, "잘하는게 뭐에요?" 라는 질문에 대답할 게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는 무엇인가 하나의 특기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책에서, "칠판 깨끗히 지우는 사람, 오리기 잘하는 사람, 연필 잘 깎는 사람이 되면 왜 안되 ? " 라는 구절을 읽고, 나도 연필을 잘 깎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날부터 매일 연필 깎는 연습을 했다. 연필을 깎기위해 연필을 열심히 썼고, 색연필로 책에 줄을 쫙쫙 그어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척 하곤 했었다.
하루 삼십분씩은 연필을 깎았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도 연필을 깎아주겠다고 얘기하며 친구들의 연필을 수거해서 깎아줬고, 어느순간 나는 연필을 잘 깎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나의 작은 소망은 그렇게 이루어졌었다.
그 다음부터는 [특기] 란을 채우기 위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특기] 연필깎기, 남들에겐 황당하고 터무니 없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너무 뿌듯한 나의 특기였다.
취업을 위해 쓰던 이력서의 [특기]란에도 나는 당당히 연필깎기라 쓰곤 했었다. 그리고 면접을 볼 때마다 특기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다.
"특기가 연필깎기 라구요 ??"
"네. 손으로 연필을 연필깎기(기계) 처럼 잘 깎을 수 있습니다."
"거참 특이하네~"
면접관들에게 보여줄 순 없었지만, 나는 정말 연필깎기가 내 특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당당했었다.
그리고 그 연필을 잊고 몇년을 살았다.
문득 연필이 생각났다. 재생지 위를 사각거리며 지나가는 연필의 감촉이, 그리고 내 손 위에서 매끄럽게 벗겨지는 나무의 결을 다시 느끼고 싶어져 연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연필을 깎았다.
그러고 보니 손으로 무엇인가를 길게 써 보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을 깎은 기념으로 빈 종이에 이런저런 내 마음들을 끄적여 본다. 자연스레 내 손은 슬슬 미끄러져 나에 대한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렇구나.. 내가 참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연필을 잘 깎지만 어쩐지 예전의 연필을 깎던 나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연필로 답을 쓰던 예전과, 연필로 질문을 쓰는 지금의 나.
지금의 내 삶이 물음표로 생겨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떻게? 라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는 요즘의 내 삶.
사실 내게는 꾸준함 이라는 자질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고자 하는 의욕은 넘쳐 무엇인가 늘 시작하려 하지만 꾸준함의 결여로 끝을 보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다. 쉽게 결정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
'나는 원래 그런 스타일 이니까.'
라는 말로 더이상 스스로를 내려놓지는 말아야겠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자만, 나를 향한 나의 오만. 그것으로 예전의 나는 살아왔지만 예전과 같은건 하나도 없는 지금은 쓸데없는 허상일 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마침표로 끝난 나의 과거와 물음표로 남을 나의 지금과 미래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마침표를 찍고 물음표를 그리는 내 손 끝에 직접 깎은 잘 다듬어진 연필이 쥐어져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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